일단은 불쌍해 보일 필요가 있다는 것일까. 사저 복귀 하루째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습을 전하는 친박계 인사들의 주장 속에서 어떤 가소로움을 본다. 자유한국당 조원진 의원은 13일 오전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를 방문해 1시간 20분 가량 대화를 나누고 나와 “거실이 무척 추웠다”고 설명했다. 보일러가 아직 고쳐지지 않아 연기가 많이 났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조원진 의원은 또 “다리를 다쳐 힘들어 한다”, “몸이 안 좋은 것 같다”, “표정이 좀 힘든 것 같았다”는 등의 주장을 내놓으며 끌려 내려온 국가 지도자의 비참한 현재를 증언했다. 검찰 조사나 탄핵 인용 문제 등에 대해서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1시간 20분 동안 삼성동 사저의 추위만 체감하고 온 모양이다.

일부 보도에 의하면 박근혜 전 대통령은 삼성동 사저를 중심으로 새로운 구심을 만든 상태다. 공식 직함이나 체계가 없으니 그저 ‘삼성동 권력’이란 말 정도가 어울린다. 서청원, 최경환 의원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보좌하는 그룹의 좌장을 맡는다고 하고 법률은 김진태 의원, 언론은 민경욱 의원, 정무는 조원진 의원과 윤상현 의원이 담당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조원진 의원이 전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상태는 ‘정무적 고려’가 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조원진 의원이 전하는 바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동정론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부모를 흉탄에 잃고 절치부심해 대통령이 됐으나 주변의 음모에 휘말려 제대로 항변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삼성동 사저에 유폐됐다는 식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법률 대리인을 맡아 헌법재판소와의 전투(?)에서 선봉에 섰던 김평우 변호사가 “연약한 여자”라는 단어를 동원해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극을 설명하려 들었던 것과 동일한 논리다.

자유한국당 조원진 의원이 13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동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를 나서며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옛 야권 지지자들에게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상한 사람’으로 인식돼있으나, ‘태극기 집회’로 대표되는 지지자들에게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성녀’에 가까운 사람이다. 얼마 전 더불어민주당 표창원 의원이 주최한 전시회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습을 여성의 나체 그림에 더한 그림이 전시된 것에 이들이 분노한 이유는 그 작품이 갖고 있는 여성혐오적 코드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성녀’의 이미지가 훼손된 것에 의한 것으로 보였다.

이렇게 본다면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결정 이후에도 친박계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성녀’ 이미지를 덧씌워 난국을 타개하려는 방법을 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입히려는 ‘성녀’로 요약될 수 있는 이미지 역시 여성혐오적 인식의 도착적 재생산이라는 점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왜곡된 이미지를 재차 이용하는 것은 바림직한 정치의 형태가 못 된다. 따지고 보면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에는 이런 이미지가 작용한 탓이 크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과거 야권 일각에선 박근혜 전 대통령을 두고 ‘재클린 케네디’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런 이미지가 그의 당선에 크게 일조했고 지금도 60대 이상 고령층 유권자들에게 어필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식의 이미지가 아니라 실제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무엇을 하였느냐이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결정은 극히 보수적인 방식으로 이뤄졌다. 전원일치 판단을 이끌어 내기 위해 사건 관련자들의 재판 과정에서 인정된 사실들만으로 탄핵 인용 논리를 구성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대통령의 7시간 문제나 뇌물죄 적용 등이 탄핵 인용 논리에서 빠진 것은 이런 이유다.

뒤집어 말하면 헌법재판관들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던 문제가 바로 탄핵 인용 논리의 핵심이었던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 및 개입 사실과 이에 대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불성실한 태도 문제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둘러싼 숱한 의문과 의혹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불분명한 이유로 최순실이라는 사인에게 사사롭게 넘겨줬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대한민국 법체계를 부정했다. 헌법재판소의 전원일치 결정은 이것은 헌정위반이라는 점에 일말의 의문을 남기지 않았다.

13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 주변에 박근혜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모여 있다. (연합뉴스)

‘삼성동 권력’들은 촛불시위 세력과 헌법재판소가 대한민국 법치를 무너뜨렸다고 하는데 실상은 그 반대다. 누구보다도 법과 체계를 존중해야 할, 보수세력을 자임하는 ‘삼성동 권력’들은 21세기 한국의 법과 체계를 거슬러서 ‘박근혜’라는 개인의 이미지로 정치를 희화화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의 이미지에 모든 정치적 문제를 일렬로 종속시키는 것이야 말로 박정희주의의 잔재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성녀’로 만든 특별한 관대함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결국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물학적 자녀라는 점이 이런 이미지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들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은 오늘날 북괴(?)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키고 우리를 풍요롭게 살게 해준 사람이다. 그 공을 생각한다면 최순실 씨에게 이용당하고 연설문을 대신 쓰게 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허물 정도는 덮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법 또는 원칙을 어겼는지가 아니라 누구를 어떤 이유로 봐주는 게 더 중요한 이런 정치, 즉 법과 원칙은 명분에 불과할 뿐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는 바로 이 사실이 한국에서 박정희주의를 가능케 한 하나의 인식적 토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조원진 의원이 나서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다시 ‘불쌍한 사람’으로 만든 것은 결국 ‘앙시앙 레짐’을 향한 정치적 욕망을 노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헌정 역사상 최초로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교훈은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올바른 가치와 정책을 추구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탈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이 대통령이 될 사람을 가치와 정책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의 폭력 행사와 ‘가짜 뉴스’로 지금은 피해자인 것과 같은 모습이 돼버렸지만, 이를 만드는 데 역할을 해야 할 핵심 중 하나가 언론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같은 불행은 특히 언론의 대오각성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피해자’처럼 만들고 싶어 하는 ‘삼성동 권력’들에 언론이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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