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사실상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취지의 선언을 함으로써 파장이 확대될 전망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12일 삼성동 사저로 복귀하면서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내놓았다. 헌재의 탄핵 인용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시위 참가자가 사망하든 말든 여전히 자신은 죄가 없으며 검찰 및 특검과 국회, 언론이 ‘엮어도 너무 엮었다’고 하는 생각이 변하지 않았음을 시사한 것이다. 그야말로 마지막까지 치졸한 행동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런 입장을 밝힘으로써 한국에도 21세기적 흐름에 맞춰 독립된 극우세력이 등장하는 계기가 될 것인지 주목된다. 그간 ‘아스팔트 우파’로 불렸던 극우적 흐름은 정권과 결탁한 전경련 등의 조직적 지원을 매개로 사실상 집권당의 하위 세력으로 기능한 측면이 컸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12일 저녁 청와대를 떠나 서울 강남구 삼성동 사저에 도착해 친박계 의원들과 지지자들과 인사하고 있다.(연합뉴스)

그런데 이번 일로 보수세력이 정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극우적 흐름이 기성 정치권과 완전히 분리된 형태로 결집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른바 친박 정치인들은 삼성동 사저 앞에서 도열을 한 상태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맞이하였는데, 정작 이들이 속한 자유한국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발언에 별다른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자유한국당이 ‘아스팔트 우파’들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는 국면으로 갈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시나리오가 예상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여의도 언저리에서는 이른바 ‘TK자민련’이란 표현으로 이런 상황을 예측한 바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편드는 친박 정치인들의 입장에선 연령대별로 보면 60대 이상, 지역별로 보면 대구경북지역 유권자들을 기반으로 해서 다음 총선 까지 명맥을 이어나간다는 계산이 있는 게 아니냐는 해석이다.

여론조사로 말하자면 최순실 등에 의한 국정농단 사태가 절정에 이른 시기에도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한다는 취지로 응답한 5% 내외의 수치가 지지의 하한선이고 마지막까지 탄핵에 반대한 20% 내외의 수치가 상한선이다. 이 중간 어딘가 정도만 확보한다면 집권은 어렵더라도 정치권에 일정한 영향력은 계속 행사할 수 있다.

이러면 검찰의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큰 부담을 짊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모든 의혹을 인정하고 수사에 임해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혐의를 전면 부정하니 난감해질 수밖에 없다.

검찰은 이번 주 수사에 돌입해 이번 달 내에 마무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데, 그러면 박근혜 전 대통령은 빠르면 이번 주, 늦으면 다음 주에는 검찰에 소환조사를 받아야 한다. 만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소환에 응하지 않을 경우, 더 이상 ‘불소추특권’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이므로 구속 등 강제수사도 검토될 수 있다. 이러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조직적 저항에 돌입할 것은 기정사실이다. 자칫 잘못하면 수사 일정이 늦어져 조기대선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어떤 경우든 논란은 계속 커질 수밖에 없다.

결국 삼성동 사저로 들어가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입장을 내놓은 것은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을 방패로 삼아 검찰 수사를 방어하려는 목적도 담긴 게 아니냐는 의혹을 피할 수 없게 된 셈이다. 지지자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이동 여부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도 이런 해석의 근거다. 박근혜 전 대통령 측은 애초 13일 청와대 퇴거를 시사했으나 돌연 12일 18시로 일정을 변경한 바 있다. 그러나 지지자들은 이미 그 전부터 삼성동 사저 앞에 진을 친 상태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 측이 미리 일정을 전달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그림이다.

그런데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이런 행보는 장기적으로 오히려 이번 정국의 최대 수혜자 중 하나인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의 입지를 강화시켜주는 근거가 될 가능성도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보는 야권 지지자들이 갖는 감성은 그가 ‘비정상’에 가까운 대통령이었다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이를 사사롭게 최순실이라는 민간인에게 위임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될 수 없는 사실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마지막까지 보여준 모습도 ‘비정상’의 모습 그대로이며, 그를 따르는 지지자들이 헌재의 결정에 항의하며 기자들을 폭행하는 무법천지를 만든 것 역시 마찬가지다. 야권 지지자들이 갖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불쾌한 감정은 조기대선 국면에서도 없어지지 않고 이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이런 현실은 김종인 전 의원 등이 추진하는 제3지대 개편의 동력 형성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걸로 보인다. 김종인 전 의원을 포함해 문재인 전 대표를 제외한 나머지 대권주자들은 헌재의 탄핵 인용 결정 직후 대선 구도가 요동칠 것으로 예상해왔다. ‘정권교체’ 프레임이 힘을 잃고 앞으로 한국을 이끌 지도자로서 누가 더 나은 소양을 갖고 있는지를 겨루는 ‘인물론’이 힘을 얻을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자체적인 세력화를 모색하고 상식 이하의 행동을 반복하면 ‘정권교체’ 프레임은 연장될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무언가의 정치적 시도를 계속하고 있고, 아주 일부라 할지라도 거기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야권 지지자들에게는 위협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야권 지지자들에게 멀게는 1987년의 양김 단일화 실패의 교훈을, 가깝게는 “다 이긴 줄 알았는데 졌더라”는 결과가 된 2012년 대선의 상황을 연상케 하는 측면이 있다.

김종인 전 의원 등이 대선 후 개헌을 실행하겠다는 공약에 합의하는 걸 제3지대 구축의 ‘정치적 고리’로 삼겠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여론은 이들의 바람과 달리 돌아가고 있다는 것도 문제다. 복수의 여론조사 결과는 개헌 논의에 대해 응답자 다수가 대선 이후를 시점으로 잡고 있고 그 내용에 대해서도 ‘4년 중임제’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사실상 더불어민주당의 입장과 인식을 같이 하는 것이다.

보수세력은 문재인 전 대표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에 매우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문재인 전 대표의 확장력을 제한하는 효과를 발휘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이유로 문재인 전 대표 지지층의 응집력이 조기대선 국면에 계속 유지되면 다른 주자들이 이를 넘어서는 것은 쉽지 않다. 비정상적 권력에 대한 대중의 경계감이 크면 클수록 “될 사람 뽑자”는 논리는 힘을 얻는다.

물론 문재인 전 대표의 당선이 여전히 확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간 여론조사 1위를 달리는 대권주자로서 ‘부자 몸조심’을 해온 한계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캠프에서 홍보부본부장을 맡았던 더불어민주당 손혜원 의원의 발언 논란이 대표적이다.

손혜원 의원은 지난 9일 ‘정치, 알아야 바꾼다!’란 제목의 팟캐스트 방송에 출연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승부사 기질을 논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에 대해서도 “계산한 것”이라고 발언해 비판을 받고 있다. 앞의 구도로 말하자면 ‘비정상’에 가까운 발언이다. 비록 캠프가 빠르게 대응하긴 했지만 이런 사례는 앞으로도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게 문제다. 검증이 끝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더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순간, 김종인 전 의원 등이 오매불망 기다리는 ‘인물 경쟁’에 불이 붙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대목이 이번 대선의 마지막 승부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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