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날이 밝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되느냐 마느냐가 결정되는 중요한 날이다. 오전 11시부터 진행되는 선고기일에서 8인의 헌법재판관 중 6명 이상이 탄핵 의견을 내면 박근혜 대통령은 직을 잃게 된다. 별도의 이의절차도 없기 때문에 선고 즉시 결정이 확정되고 효력이 발생한다. 이후 60일 이내에 조기대선을 치러야 한다. 대선이 치러지는 날짜는 5월 9일이 유력하다고들 한다.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 D-day (PG) 9제작 최자윤, 연합뉴스)

언론은 ‘승복’을 말하고 있다. 탄핵에 찬성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이 극한대립을 하는 상황에서 헌법재판소의 결정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면 더 이상의 추가적인 어떤 절차 또는 과정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보수언론은 탄핵이 인용되든 기각되든 모든 정치세력이 더 이상의 논란을 반복해선 안 된다면서 그간 촛불집회에 꾸준히 참여해 온 야권의 대권주자들을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태의 본질을 꿰뚫을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졌다는 대통령이 피해자를 자처하고 있는 상황이다. 모든 것이 음모이고 자신이 통제권을 갖는 수사기관과 스스로 임명한 특검마저도 믿을 수가 없다면서 청와대 압수수색과 대면조사도 거부했다. 수사가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증거가 없지 않느냐”라며 모든 의혹을 부정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8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탄핵 민심’을 언론이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묘사한 결과로 여기는 듯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나름의 해명에 나서면서 정윤회 씨와의 밀회설이나 사이비 종교설 등을 특히 강력하게 부인한 것을 보면 그렇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엮어도 너무 엮은 것”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억울하다는 것이다.

대통령 탄핵 심판 결정을 하루 앞둔 9일 오후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탄핵을 촉구하며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탄핵 민심’이 압도적이 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헌정을 유린했다는 것과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치졸한 대응을 반복한 결과로 보아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권력을 공익적으로 사용하지 않았고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최순실 씨 등에게 사사로이 넘겨주었다. 이는 현대적인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박근혜 정권이 이런 와중에도 ‘정책적 유산’을 남기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걸 보며 국민들은 더 불안해하고 있다. 사드 장비 일부를 급히 반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반도 사드 배치가 문제인 것은 이것이 결국 박근혜 정권의 대북정책을 ‘북한붕괴론’에 기반한 것으로 최종 인준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권과는 차별화됐던 대북온건책이나 친중정책 등은 북한이 붕괴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용도였음이 명확해졌고, 어차피 한미동맹으로 균형추가 기우리라는 것은 이미 처음부터 예정돼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미국이 이를 강하게 요구했다 하더라도 박근혜 대통령이 직무정지인 상태에서는 결정을 미루는 것이 신의성실한 자세이다. 그러나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은 ‘북한붕괴론’에 기댄 현재의 대북정책이 되돌려질 수 없도록 조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 실제 조선일보 등은 “이미 사드 장비 일부가 들어왔으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식으로 주장하면서 “차기 정권이 곤란한 결정을 해야 할 일을 현 정권이 해준 것이니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는 게 좋다”는 취지의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김한솔을 둘러싼 여러 논란에서도 이런 기류가 감지된다고 하면 과한 해석일까. 김한솔이 동영상을 통해 등장한 과정에는 여러 의구심이 남는 게 사실이다. 국정원이 김한솔 등장 이후 신속하게 “동영상의 김한솔은 본인이 맞고 직접 올린 것으로 보인다”고 밝힌 것이나 보수언론 등이 사실상 출처가 없는 기사를 통해 김한솔의 도피 과정 등에 대해 지나치게 자세한 정황을 전한 것 등이 그렇다.

일부 언론들은 ‘북한 망명정부’를 언급하고 있다. 그간 우리 정부는 북한 망명정부를 미국에 만들겠다는 시도에 대해 “일부 탈북민단체들의 일탈”이라며 그 실효성을 부정한 바 있다. 우리 헌법은 북한 정권을 정부로 인정하지 않는데 망명정부 구성을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러나 만일 모습을 드러낸 김한솔을 북한 망명정부 운동에 어떤 방식으로든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한다면, 그리고 이 상황에 국정원 등 한국 정보기관이 연관돼있다면 이 역시 현재의 남북관계를 ‘이외의 선택’이 불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요소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 놓고 여기에 반발하는 야권의 인사들은 ‘종북’을 만들거나 ‘중국 사대주의자’로 평하는 게 현재 보수세력이 하는 일이다. 정책적 토론이 아니라 여론몰이를 하고, 나라의 미래를 놓고 공익적 방식으로 권력을 쓰는 게 아니라 오직 정치적 유불리에 맞춰 권력을 활용한다. 나라가 촛불과 태극기로 양분되고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혁명을 하니 아스팔트를 피로 물들이니 하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정치의 이런 세태 때문이지 대선주자들이 촛불집회에 참석해서가 아니다.

이제 탄핵 이후는 그야말로 ‘새로운 대한민국’이 되어야 한다. 이 새로운 대한민국에서 정치는 신의성실한 방식으로 이뤄져야 하고 권력은 스스로를 공익적 방식으로 규정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 기회를 계속해서 놓쳐왔다. 대표적인 것이 세월호 참사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모든 정치세력이 그간 모든 적폐를 걷어내고 다시는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는 결의와 약속을 했지만 실제로 무엇이 바뀌었는지 의문이라는 목소리가 여전히 높다. 진상은 완전히 규명되지 못했고 재발 방지도 요원하다.

냉소적으로 본다면 탄핵도 세월호 참사처럼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박근혜 대통령과 지지자들은 여전히 장외에서 목소리를 키울 것이고 이들이 2020년 총선까지 그간 정치권이 언급해온 ‘TK자민련’ 등의 형태로 존속할 가능성도 있다. 탄핵을 통해 대한민국을 보기보다는 정치적 유불리만 보는 흐름이 일상화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들이 뻔히 예측된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은 어떤 메시아적 존재의 도래가 아니라 오로지 국민이 그것을 강하게 요구할 때만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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