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두 쪽이 났다고 한다. 태극기와 촛불로 나뉜 3·1절 풍경을 보며 구한말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다. 찬탁 반탁으로 나뉘었던 분단 직전 상황에 대입해보려는 사람도 있다. 대외적 차원에서 긍정적인 것 보다는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요인이 많은 때인데 나라가 분열돼서 걱정이라는 아주 상식적 차원의 우려를 내놓는 사람도 있다.

이른바 ‘태극기 집회’를 주최한 측은 500만 명이 모였다고 자평한다. 과연 500만 명이 광장에 모인 것인지 의문이긴 하지만 지금까지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모인 것만은 분명하다. 3월 1일이라는 시점이 영향력을 발휘한 측면도 있다. 자유총연맹 등 보수단체가 이를 근거로 해 많은 인원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조직력’의 차원에서만 이 현상을 해석하는 건 일면적이다. 언론이 전하는 태극기 집회의 풍경을 보면 그렇다. 태극기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 중 하나는 “내 돈 내고 나왔다”는 거다. 이것은 말하자면 ‘태극기 알바론’에 대한 반론이다. 최근 청와대가 전경련을 통해 일부 보수단체의 운영비 등을 지원토록 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태극기 집회의 ‘동력’에 의문을 표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태극기 집회에 참가해서 자기 돈 내고 왔다는 사람들은 이런 시각을 불편해 하고 있는 거다.

그럼 누가 동원한 것도 아닌데 이들이 광장에 나온 이유는 무엇인가. 태극기 집회에 등장한 조형물, 발언 등을 검토하면 몇 가지 그림이 그려진다. 첫 번째는 ‘종북’에 대한 우려이다. 태극기 집회에 성조기가 등장한 게 바로 이런 맥락이다. 성조기는 한미동맹을 표상한다. 태극기 집회가 한미동맹을 강조하는 것은 ‘종북’에 대한 위기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종북’이란 ‘야당’이며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권주자 중 1위의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이다. 문재인 전 대표가 취임 이후 “북한을 먼저 가겠다”고 했다거나 사드 배치에 반대한다는 주장을 했다는 사실은 이런 인식의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몇 차례 지적한 바 있지만 ‘종북’이란 결국 ‘속아 넘어간다’의 의미를 포괄하고 있다. 과거에는 “말 많은 사람은 간첩”이라는 논리가 횡행한 일도 있다. 이 논리에서 ‘말이 많은 사람’이 간첩인 이유는 공산주의자들이 겉으로는 여러 좋은 말을 많이 늘어놓지만 이는 결국 뒤에서 북한을 이롭게 하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다는 게 여러 번 증명이 됐기 때문이다. 때문에 ‘종북’은 말로 이길 수가 없다.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폭력을 써야 한다. 이 집회에서 “빨갱이는 죽여야 한다”는 구호가 나오는 것은 이런 신념체계 때문이다. 실제로 과거 좌우대립이 극한에 달했을 때 “빨갱이는 죽여야 한다”는 믿음을 직접 실천한 집단도 있다.

3·1절인 1일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 주최 탄핵 반대 집회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두 번째는 ‘억울함’이다. 태극기 집회의 참가자들은 대개 억울해 한다. 이 억울하다는 감정에는 물론 기성 정치와 언론에 대한 일반적 불신이 작용한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지적한 바 있다. 정치와 언론이 대중을 속이고 뒤로는 자기들만의 사익을 추구한다는 정치적 냉소주의가 박근혜 대통령을 둘러싼 문제에 그대로 적용된다. ‘촛불 시민’들의 관점으로 보면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씨가 국민을 속이고 제 사익을 추구한 것이지만, ‘애국 시민’들의 눈으로 봤을 때는 야당과 언론, 검찰 및 특검과 헌법재판소까지 국민을 속이는데 동참하고 있다.

그런데 태극기 집회의 참가자들이 호소하는 ‘억울함’에는 이런 차원 이상의 생각도 작용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과거’에 대한 서술이 그렇다. 태극기 집회의 참가자들은 “어른들이 왜 거리에 나와 이러는지 생각해보라”거나 “부족한 것 없이 자란 젊은이들이 함부로 날뛰고 있다”는 식의 발언을 반복하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숭상하는 표지가 등장한 것까지 묶어서 보면 이게 어떤 ‘공통된 세대적 인식’ 속에 나오는 행위와 발언이라는 직관을 얻을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억울함’의 정체는 “그래서 내 잘못이라는 거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무언가를 잘못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박근혜 대통령 대리인단도 수차례 “정치를 잘못했다는 것과 무능했다는 것이 탄핵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태극기 집회에 나온 사람들의 발언 중 가장 논리적인 것의 형태도 “잘못은 했지만 탄핵을 당할 정도는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들의 인식 속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잘못은 했을지언정 탄핵 대상이 아니어야만 하는 이유는 ‘박근혜 대통령’을 만든 사람들이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2012년 대선 직후 문재인 전 대표 패배에 대해 나온 가장 즉자적인 분석은 젊은층이 투표를 많이 하지 않아 패배했다는 거였다. 이게 실제로 그랬는지 통계적으로 확인할 수 있느냐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어쨌든 젊은 세대가 문재인 전 대표를 지지했고 상대적으로 고령인 세대가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을 당할만한 잘못을 했다는 것은 곧 대통령을 잘못 뽑았다는 말이나 같다. 실제로 촛불 시위에 참여한 젊은 세대의 일부는 이런 주장을 공개적으로 하고 있다. 태극기 집회의 참가자들은 바로 이 대목에 반응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의 잘못이 ‘내 잘못’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냉소주의적 문법이 일반화된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논의가 문제의 핵심에 가 닿는 게 아니라 그래서 누가 잘못했다는 것인지 누구의 책임인지를 따지는 것에만 몰입한다. 책임을 면하기 위해 책임을 져야 할 대상과 자신을 분리하는 것도 늘 있는 일이다. ‘진짜 나쁜 놈’은 따로 있으나 자신이 ‘진짜 나쁜 놈’의 책임까지 다 뒤집어쓰고 과도한 피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라는 논리는 다시 말하자면 박근혜 대통령 당선이 갖고 있는 어떤 ‘시대정신’을 지키고 싶다는 욕망과 연결된다. 이 욕망은 태극기 집회에 참가한 이들이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한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이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통해 관철하고 싶었던 것은 ‘박정희주의의 복권’이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들의 인식 속에서 민주 정부 10년은 역사의 단절이고 이명박 정권 5년은 천박한 정치와의 어떤 ‘타협’이었을 따름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물학적 자손인 박근혜 대통령을 당선시킴으로써 드디어 ‘박정희주의의 복권’에 마침표를 찍었는데, 그것이 바로 파국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3·1절의 우울한 풍경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통찰은 그저 나라가 두 쪽이 났다거나 기득권의 속임수에 넘어간 사람들의 바보 같은 행위들의 끔찍함 같은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흐름이 역사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며 여기에 필요한 해답을 우리가 과연 만들어낼 수 있느냐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광경이 지시하는 ‘시대정신’이란 과연 무엇인지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2017년 대선에 출마하는 대권주자들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한 상태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게 얼마나 절박한 문제가 되었는지는 더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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