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 신철식에 의해 하나씩 공개되는, 박정우가 적은 기억의 단초들은 흥미로운 것인가? 징벌방에서 손톱이 빠지도록 새겼던 기억들을 신철식은 알고 있다. 하지만 교도관들은 알지 못하는 그 비밀의 얼개는 헐겁다. 신철식을 통해 비밀을 하나씩 공개하는 방식 자체는 흥미롭지만 그 과정이 전체의 완성도를 떨어트리는 것만은 분명하다.

16K와 묻혀 있던 트렁크;
변절자가 된 강준혁, 악랄한 차민호 그리고 기억과 싸우는 박정우

미결수이기는 하지만 감옥에 갇힌 정우가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기억마저 가물가물한 상황에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니 말이다. 교도소장은 차민호의 편에 서서 정우를 궁지로 몰아넣기에 여념이 없다. 그들에겐 오직 자신의 안위만 중요하니 말이다.

틀은 이미 갖춰져 있다. 선과 악은 명확하게 나뉘어 있다. 그 구도가 달라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 편은 갈려있고 진실을 찾기 위한 과정은 결국 복수다. 그 복수를 통해 정의를 되찾는 과정이다. 차민호는 어떤 존재인가? 그가 얼마나 악랄하고 강력한가에 따라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SBS 월화드라마 <피고인>

차민호가 왜 그렇게 잔인한 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피고인>은 아버지에게서 그 이유를 찾고 있다. 잔혹하고 냉정한, 차명그룹의 회장 차 회장의 피를 물려받은 결과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잔인한 폭행이 일상이 된 그리고 같은 쌍둥이지만 형만 편애했던 아버지로 인해 민호는 망가질 수밖에 없었다.

펜싱을 하다 형으로 인해 눈까지 다쳐 '첨단 공포증'을 얻게 되었다. 물론 이 병이 곧 차민호가 몰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는 점은 익숙하지만 단순하다. 아버지의 포악함을 그대로 물려받은 민호, 아버지는 그런 민호가 싫었다. 자신을 그대로 닮은 민호를 밀어내고 싶었다.

차 회장은 현재 살아있는 것이 착하고 영특한 선호가 아닌 민호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누구보다 자신을 닮은 민호를 그가 몰라볼 리가 없다. 그럼에도 스스로 민호를 선호라고 믿는 척하는 것은 자신이 세운 차명그룹이 붕괴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차민호를 돕는 존재 중 하나가 정우의 오랜 친구인 준혁이다. 함께 법대를 다니고 검사가 되었던 둘은 절친이었다. 너무 친해 지수까지 함께 사랑했다. 정우를 선택한 지수에게 준혁은 여전히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의 사고가 있었던 그날 새벽 정우의 집을 찾은 준혁에게는 강렬함이 여전히 존재했었다.

SBS 월화드라마 <피고인>

준혁이 처음부터 민호를 도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달콤한 제안에 무너지고 말았다. 정우가 갈 예정이었던 UN 파견을 미끼로 거니 준혁은 자연스럽게 민호의 편에 서게 되었다. 탐욕이 모든 것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바로잡을 수 있는 상황에서 준혁은 진실을 밝히지 못했다.

이제 준혁이 할 수 있는 일은 철저하게 범죄자에 동조하는 것이었다. 중요한 증거들을 폐기하고 정우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준혁은 그렇게 스스로 수렁 속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12시부터 1시 30분 사이에 정우 집을 찾은 자가 살인범이라는 주장은 준혁 스스로 모든 것을 망치게 만든 이유가 되었다.

순간적으로 선택한 준혁의 이런 행동은 결국 어쩔 수 없이 민호의 편에 서서 정우와 싸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는 전선을 명확하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교도소에 갇힌 정우는 어떻게 든 기억을 되찾으려 하지만 쉽지 않다. 그 기억을 대신할 단편적인 기억들을 신철식은 봤다.

신철식은 담배 한 갑을 주면 새로운 기억을 되찾아주겠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50만 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미 정우와 싸웠던 너구리는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 않다. 그런 그에게 맷값으로 대신하는 정우는 절박했다. 어떤 식으로 든 기억을 되찾는 것이 중요했으니 말이다.

SBS 월화드라마 <피고인>

어렵게 찾은 '16K'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정우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정우와 함께 일했던 고동윤 수사관은 중요한 단서를 확인하게 된다. 고 수사관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정우를 믿었다. 그리고 정우가 수사하고 있던 증거 중 하나인 '첨단 공포증'을 그는 확인했다.

펜싱 경기를 하던 민호가 쓰러지는 상황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민호가 쌍둥이 형의 흉내를 낼 수는 있지만 모든 것을 대체할 수는 없었다. 사인이 여전히 민호라는 사실을 깨닫고 국과수의 자료를 폐기하려던 민호는 앞서 고 수사관이 문건을 가져간 것을 알고 보복을 한다.

중요한 문건을 가지고 서 변호사를 만나려던 고 수사관은 그렇게 교통사고로 위장된 살인의 희생자가 되었다. 살해당했는지 중환자가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조금씩 거짓은 허물을 벗으며 진실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어린 조카를 찾기 위해 정우가 알려준 장소를 파헤치던 태수는 절망 속에 정우의 이름이 붙은 트렁크를 발견하게 된다.

정우는 '16K'가 바로 딸 하연의 몸무게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연을 떠올리게 하는 몸무게를 뜻하는 단어와 트렁크, 그리고 오열하는 태수. 언뜻 트렁크 안에 하연이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만약 하연이 그렇게 죽은 채 발견된다면 이후 이야기는 단순한 복수극만 남게 되기 때문이다.

SBS 월화드라마 <피고인>

하연이 살아 있어야만 단순한 복수를 넘은 가치를 만들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트렁크 속에는 하연이 아니라 정우가 범인이 아니라는 단서가 담겨 있을 가능성도 있다. 태수가 정우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함께 진실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복수극을 넘어 희망을 품기 위해서는 하연이 살아있어야만 한다. 하연은 살아있다.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하연을 찾기 위한 이들의 여정은 이제 그 정체를 드러낼 시점이 되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인 법적인 지식을 통해 교도소에 있는 이들을 지켜내는 정우로 인해 교도소에 함께 있던 이들은 거대한 악인 차민호와 맞서 싸우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 모든 과정의 변곡점은 바로 태수가 찾은 트렁크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하연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결국 정우를 중심으로 민호에 맞서 싸우는 이들이 결집될 수 있는 이유로 다가올 테니 말이다. 정우가 교도소를 나와 진범인 민호를 잡을 수밖에 없는 동력은 바로 하연이 살아있다는 희망 외에는 없으니 말이다.

영화를 꿈꾸었던 어린시절의 철없는 흥겨움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힘겨움으로 다가오는지 몸소 체험하며 살아가는 dramastory2.tistory.com를 운영하는 블로거입니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재미없게 글을 쓰는 '자이미'라는 이름과는 달리 유쾌한 글쓰기를 통해 다양한 소통이 가능하도록 노력중입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