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이후 정치권을 달구는 새로운 이슈는 ‘보수 단일후보’에 대한 것이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의 ‘대세론’이 형성되는 국면이 닥쳐오면서 이에 맞설 보수후보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보수 단일후보’ 구상은 외교안보적 쟁점과 개헌론을 토대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골적인 메시지를 먼저 내놓은 것은 조선일보다. 조선일보는 31일 지면의 ‘김대중 칼럼’에서 문재인 전 대표를 ‘문씨’로 지칭하며 안보관 등을 문제 삼았다. 또, “‘문재인이 아닌 것’ 즉 anything but Moon의 길로 가야 한다”면서 범보수 후보들의 단일화를 통해 문재인 전 대표의 집권을 막아내야 한다고도 했다.

조선일보 31일 지면 칼럼

바른정당의 유력 대권주자인 유승민 의원도 유사한 주장을 내놓고 있다. 유승민 의원은 30일 여의도 캠프 사무실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문재인을 상대로 승리할 보수 후보로 단일화 노력을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면서 “보수가 나아갈 큰 방향에 대해 동의하는 분들이라면 후보를 단일화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위에서 조선일보가 내놓은 ‘반 문재인 단일화’ 구상과 상당 부분 일치하는 취지의 발언이다.

유승민 의원은 정치경제적 쟁점에서는 박근혜 정부와 상당부분 견해를 달리하지만 외교안보 문제에 있어서는 강경보수의 색깔을 띠고 있다. 이 역시 조선일보가 주장하는 바에 들어맞는 요소다. 조선일보는 위의 칼럼에서 “문씨의 안보·외교 노선의 국정 방향에 반대한다면 후보로서 단일화는 있을 수 있다. 공개적인 단일화가 아니더라도 사퇴라는 형식을 취한 단일화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보수 단일후보의 중심이 외교안보 정책에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는 셈이다.

범보수권 후보들 간의 단일화를 이룰 수 있는 또 하나의 유력한 재료는 개헌이다. 위의 칼럼에서 조선일보는 “단일화를 통한 연합전선은 분권형 개헌 작업의 밑바탕이 될 수 있고 실제로 단일화에 성공해 정권 창출이 이뤄진다면 그 결합은 내각책임제 또는 이원집정부제의 시범적 모형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썼다. 대선 전 개헌은 힘들겠지만 대통령 후보를 양보한 사람이 실권을 갖는 국무총리 등을 맡아 국정을 책임지는 모델을 고려하라는 취지다.

사실 이는 처음 나오는 얘기가 아니다. 그간 분권형 또는 이원집정부형 개헌론의 주인공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으로 인식돼왔다. 반기문 전 총장은 외교에 특화돼있으므로 그를 대통령으로 하고 국무총리가 내치를 전담토록 하자는 취지다. 따라서 반기문 전 총장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을 전제로 할 경우 누가 국무총리를 맡을 것인가를 두고 보수정치 일각에서 기 싸움을 벌여온 게 사실이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설날인 28일 오전 충청북도 음성의 선산을 찾아 성묘한 후 정치현황에 관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반기문 전 총장이 귀국 이후 정치적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면서 이런 그림은 다소 위력이 반감되는 듯하다. 31일 언론은 일제히 반기문 전 총장과 국민의당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각각 ‘스몰텐트’를 치는 방향으로 진로를 잡은 상태라고 분석했다.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인 문재인 전 대표에 맞설 수 있는 대안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빅텐트’를 이루기 전에 반기문 전 총장은 바른정당 등의 보수세력과, 국민의당은 정운찬 전 총리 및 손학규 전 의원 등의 중도적 인사들과 따로 힘을 합치는 안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고 ‘정치교체’를 하겠다던 반기문 전 총장의 구상은 일단 실현이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빅텐트’에 비해 규모가 적은 ‘스몰텐트’라고 하더라도 바른정당 입당 이후 경선을 치르는 방안 외에는 뾰족한 수를 생각해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유승민 전 의원이나 남경필 경기도지사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을 것인지도 의문이다. 상황이 이러니 그간 반기문 전 총장 측에 설 것으로 알려졌던 새누리당 내 의원들도 행동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30일 언론을 통해 거론된 ‘반기문 승리의 길’이란 보고서는 이런 맥락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이 보고서는 반기문 전 총장이 무소속 출마, 바른정당 입당, 국민의당 입당, 빅텐트 등의 시나리오가 도움이 되지 않거나 불가능하다고 보고 신당 창당에 나설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캠프 내부에서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반기문 전 총장 측은 “반기문 전 총장에게 보고된 적도 없는 문건인 만큼 무시해 달라”는 입장을 밝힌 상태다.

눈여겨 볼 것은 이런 이합집산 속에 보수적 외교안보정책을 강력하게 말할 수 있는 ‘아이콘’이 없는 게 현실이라는 거다. 한반도 사드 배치를 강력히 주장했던 유승민 의원의 경우 외교안보정책보다는 중도적 경제정책을 중심으로 캐릭터가 구성돼있는 게 사실이다. 나머지 주자들도 파탄에 가까웠던 박근혜 정권의 외교안보정책에서 탈피해 중도적으로 이동할 가능성을 대부분 시사하고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이런 일련의 흐름이 앞서 언급한 조선일보와 같은 강경보수층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황교안 대안론’은 바로 이런 조건에서 자라나고 있다. 30일 새누리당 인명진 비상대책위원장은 TV조선에 출연해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우리 당 대선 후보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발언했다. 대권주자로서 황교안 총리에 대한 여론조사 지지율이 10% 전후의 수치인 것으로 꾸준히 확인되고 있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30일 오전 9시(우리 시간) 정부 서울청사 집무실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하고 한·미 동맹 문제 등을 논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에 대해 반기문 전 총장을 지지하는 걸로 알려진 정진석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을 통해 “황 권한대행의 대선 출마? 말도 안 되고 실현 가능성도 없는 미친 짓”이라며 “스스로 사임하고 이를 자기가 수리하고 대선에 출마한다?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라고 썼다.

놀라운 것은 이에 대해 황교안 총리 측이 기자들에게 문자를 보내 “정치인으로서 품격 있는 표현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는 것이다. 황교안 총리는 설 연휴 직전 적극적인 대민접촉을 강행하며 그야말로 ‘광폭행보’를 보였다. 이것까지 엮어서 본다면 정치에 대한 의지를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황교안 총리의 대선 출마가 현실이 되고 반기문 전 총장이 중도를 중심으로 한 정계개편에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 보수 단일후보를 둘러싼 전망이 어떻게 변화할지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결국 이 구상에 통합진보당을 해산을 주도하며 외교안보적 색깔을 강하게 드러낸 황교안 총리가 끼어들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는 개헌론을 고리로 반기문-황교안 단일화 조합이 가능해질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의 강경한 지지층은 황교안 총리에게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의 임기 만료로 공석이 된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지명하라는 요구를 강하게 하고 있다. 그래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일정이 늦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나경원 의원은 지난 29일 황교안 총리가 헌법재판관 지명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일 황교안 총리가 ‘욕심’을 갖고 있다면 이 대목에 대한 고려를 진지하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과연 무엇인지 의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사유가 분명해지는 상황에서 보수 단일후보론은 결국 보수정권 재창출의 결정적 장애물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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