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 특검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해 청구한 구속영장이 결국 기각됐다. 박근혜 대통령에 뇌물수수 혐의를 적용하려던 특검의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조의연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18시간 이상 장시간 검토 끝에 영장 기각 결정을 내렸다. “뇌물 범죄의 요건이 되는 대가관계와 부정한 청탁 등에 대한 현재까지의 소명 정도, 각종 지원 경위에 관한 구체적 사실관계와 그 법률적 평가를 둘러싼 다툼의 여지, 관련자 조사를 포함해 현재까지 이뤄진 수사 내용과 진행 경과 등에 비춰 볼 때, 현 단계에서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타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게 기각 사유다.

국민연금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결정, ‘대가성’ 약하다고 본 듯

특검이 이재용 부회장에게 적용한 혐의는 뇌물 공여, 제3자뇌물 공여,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위증 등이다. 삼성이 최순실 씨가 독일에 세운 유령회사인 코레스포츠를 통해 210억원 규모의 컨설팅 계약을 맺고 35억원에 이르는 금전을 전하는 방법으로 최순실 씨의 딸인 정유라 씨를 사실상 지원하는데 관여했다는 것이다. 또, 삼성이 최순실 씨의 조카 장시호 씨가 세운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약 16억원 가량의 금전을 지원하고 미르·K스포츠 재단에 204억원을 출연한 것을 사실상 결정했다는 혐의도 적용됐다.

뇌물공여와 횡령·위증 등 혐의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9일 오전 의왕시 서울구치소 밖으로 걸어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특검은 삼성이 이런 방식의 지원에 나선 것은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세습을 위해서라고 봤다. 구체적으로는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 국민연금이 찬성토록 했다는 것이다. 특검은 박근혜 대통령이 2015년 7월과 2016년 2월 이재용 부회장을 독대한 자리에서 정유라 씨와 장시호 씨에 대한 지원을 직접 요구했다는 사실 또한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검은 특히 삼성이 코레스포츠에 지원한 35억원에 대해서는 이회장 부회장 1인을 위한 행위로 보고 횡령 혐의를 적용했다.

이에 대한 삼성의 방어논리는 최순실 씨 일가에 거액을 전달한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대가성을 바란 것이라기보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강요에 의한 행위에 불과하다는, 즉 자신들은 ‘피해자’에 가깝다는 논리다. 또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도 경영권 승계와는 무관하다는 게 삼성의 주장이다.

특검이 제기한 혐의가 입증되기 위해서는 결국 국민연금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의 성격을 규명하는 게 핵심이다. 법원이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했다는 사실이 대가성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대목에 대해 삼성이 그간 성실하게 소명해왔다는 판단이 작용했으리라고 볼 수는 있다. 즉, 법원의 판단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이 오로지 최순실 씨 일가에 대한 지원 및 미르·K스포츠 재단 출연만으로 가능했던 건 아니라는 것에 가까운 걸로 추론할 수 있다.

특검 논리의 ‘무리수’에 대한 지적도

이와 관련해서는 특검의 논리가 다소 무리했다는 지적이 있는 게 사실이다. 지난 16일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경향신문을 통해 특검이 그린 그림의 ‘빈틈’을 지적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최대 걸림돌이 되는 사모펀드 엘리엇이 등장한 것은 2015년 6월인데 삼성이 승마협회 회장사를 맡은 것은 그 이전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는 삼성이 이미 합병이 결정된 이후에 박근혜 대통령과 이재용 부회장이 독대를 했으므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문제를 대가성이 있는 행위로 볼 수 없다는 논리를 편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김상조 소장은 다른 논리를 들어 삼성의 뇌물죄 혐의를 입증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삼성이 최순실 씨 일가를 지원한 이유가 단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문제에 국한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핵심이다. 김상조 소장은 “삼성물산을 정점으로 하는 현재의 그룹 출자구조는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삼성물산 합병보다 더 어려운 작업, 즉 지주회사 전환 작업을 거쳐야만 한다. 엘리엇 등장 이전에 삼성이 비선 실세를 포착하고 로비를 한 것은 바로 이것까지를 포함한 더 큰 목적을 위해서다”라고 썼다.

김상조 소장이 제기하는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삼성과 박근혜 정권 양쪽에 대한 더 철저한 수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상태에서 이러한 수사가 가능하리라고 믿기는 어렵다. 일부 언론은 이재용 부회장 구속영장 청구에 대해 재계 일각에서 “이런 식이면 모든 재벌 총수를 구속해야 한다”고 반응했다고 보도했다. 삼성의 ‘큰 그림’과 정권과의 이해관계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재벌을 중심으로 한 한국 경제 체제 전반과 싸워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진다.

박근혜 대통령이 새해 첫날인 1일 오후 청와대 상춘재에서 출입기자단과 신년인사회를 겸한 티타임을 갖고 참석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것은 곧 박근혜 대통령에게 뇌물죄 혐의를 적용하는 게 더 어려워졌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특검이 상정한 논리는 박근혜 대통령이 재벌 총수들의 ‘민원’을 들어주는 대가로 미르·K스포츠 재단 출연을 요구하였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민원’에는 구속된 재벌 총수의 사면 문제나 면세점 특허 갱신 문제 등이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돼왔다.

박근혜 대통령 뇌물수수 혐의 적용될까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이런 혐의를 반복해서 부정해왔다. 미르·K스포츠 재단은 문화 및 체육 관련 사업을 위해 만든 것이며 대기업의 출연은 자발적인 것이었고 자신은 국익을 위한 통치행위를 한 것에 불과하다는 논리다.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것은 향후 박근혜 대통령의 주장에 힘이 실릴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뇌물수수 혐의 적용이 완전히 물 건너 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언론은 특검이 그간 제3자 뇌물죄를 적용하기 어려울 경우를 대비해 박근혜 대통령에 직접적인 뇌물수수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고 보도해왔다. 뇌물 공여자의 ‘부정한 청탁’과 관계없이 직무와 관련한 것이면 혐의 적용이 가능하다는 게 제3자 뇌물죄와의 차이다.

이러한 혐의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미르·K스포츠 재단을 통해 돈을 끌어 모은 행위가 박근혜 대통령 및 최순실 씨의 사적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 입증돼야 한다. 또,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씨가 사실상 ‘경제공동체’라는 사실 역시 증명이 필요하다. 언론 보도를 보면 법원은 공직자가 직접 금품을 받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뇌물 수수자가 사실상 공직자와 실질적 이해관계를 같이 하고 있는 경우 뇌물죄를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해왔다.

최순실 씨 측은 특검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경제공동체 이론에 따라 뇌물죄를 운운하는 건 지금까지의 형법 이론을 뛰어넘는 것”,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무너뜨리는 일”이라는 등의 반응을 보여왔다. 법조계 일각에서도 최순실 씨와 박근혜 대통령을 이른바 ‘하나의 지갑’으로 판단해 뇌물죄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는 주장이 나오는 게 사실이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뇌물수수 혐의를 적용할 수 있느냐는 탄핵 심판의 가장 중요한 대목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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