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본격 대선행보를 시작했으나 성적은 그리 좋지 않다. ‘서민코스프레’ 논란 등을 자초하며 ‘오락가락 행보’라는 비판마저 받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이 상황이 대권주자로서 상품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수순까지 간다면 정계개편을 노리는 인물과 세력들의 운명에도 만만찮은 부정적 효과가 있을 걸로 보인다.

신호는 벌써 나타나고 있다. 국민의당 박지원 신임 대표는 16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반기문 전 총장과 박근혜 대통령 간의 전화통화를 두고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죽이 잘 맞는 것 아닌가”, “이렇게 되면 우리와 상당히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 이에 앞서 반기문 전 총장은 박근혜 대통령과의 통화를 통해 “(탄핵심판 등에 대해) 잘 대처하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지원 대표가 보기에 이 발언은 반기문 전 총장의 정치적 정체성이 결국 현 정부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는 반기문 전 총장이 놓여있는 정치적 지형 자체에서 연유하는 것이라는 점이 문제다. 반기문 전 총장은 귀국 직후 촛불 민심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일본과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해 합의한 것에 대해서도 “소녀상 이전을 대가로 한 것이라면 10억엔은 돌려줘야 한다”는 등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반기문 전 총장은 신년을 맞아 전직 대통령 및 영부인들과는 통화를 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통화 시도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반기문 전 총장이 주말 동안 사드 배치 문제를 통해 더불어민주당 및 문재인 전 대표와 강한 대립구도를 설정하고 박근혜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한 것은 이런 상황을 해소해보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반기문 전 총장이 지나치게 현 정부에 비판적인 태도를 고수할 경우 어떤 경우에도 새누리당을 찍는 보수 후보 지지표가 축소된다. 문제는 반대로 박근혜 대통령에 친화적인 모습을 보이면 중도를 지키고 있는 지지층을 잃을 수 있다는 거다. 따라서 반기문 전 총장으로서는 보수와 중도 사이의 줄타기를 감행할 수밖에 없다.

반기문 전 유엔(UN) 사무총장이 16일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노동조합에서 노조 간부들과 대화를 하다 물을 마시고 있다. (연합뉴스)

보수와 중도층을 모두 잡겠다는 전략은 이 두 가지 요인에 확실한 시너지효과만 나타난다면 충분히 승산을 논해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시너지 효과’를 언급하는 많은 실험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히려 ‘오락가락 행보’라는 논란을 자초하는 결론에 이르기도 한다. 보수도 공략이 안 되고 중도층도 공략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박지원 대표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헌정을 유린해 탄핵심판을 받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잘 대처하기 바란다”니, 뭘 잘 대처하란 말인가.

박지원 대표를 중심으로 한 국민의당 세력은 현재의 조건만 갖고 대선에 대응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일종의 외연확장과 유력 대권후보를 중심으로 한 세력재편을 노리고 있다. 지금까지 가장 좋은 시나리오로 언급된 것은 친박과 친문을 제외하고 모두 한 자리에 모여 ‘꿈의 경선’을 치르며 지지율을 끌어 올리는 것이다. 이런 구상의 범위에는 반기문 전 총장이나 손학규 전 의원 등에 더해 박원순 서울시장, 김부겸 의원 등의 더불어민주당 소속 비문 주자들 역시 포함된다.

그러나 반기문 전 총장이 ‘친박 후보’라는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면 이런 좋은 구상의 스케일도 줄어들고 만다. 지난 국민의당 원내대표 선거 때만 해도 ‘찬밥’ 신세처럼 여겨졌던 안철수 국민의당 전 공동대표가 ‘자강론’ 내세우고 있다는 점은 이 상황의 좋은 핑곗거리가 되고 있다. 연대연합은 필요하지만 스스로의 힘이 없는 상태에서 무원칙한 세력통합을 추진하는 것은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게 ‘자강론’이 추동한 새로운 논리다. 특히 안철수 전 공동대표는 반기문 전 총장을 이 과정에서 꺾고 자신이 ‘빅텐트’의 대선 후보가 돼 문재인 대 안철수 구도를 만들면 승산이 있다는 식의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사태의 본질이 반기문 전 총장의 기대 이하 지지율에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새누리당을 탈당한 인사들이 창당한 바른정당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대통령이 여전히 당적을 보유하고 있는 새누리당보다도 못한 정당지지율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정치적 지지의사를 기꺼이 보내지 않는 것이다. 이러니 국민의당 소속 인사들이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고 과감한 좌우합작(?)을 추진하지 못한다.

일부에서는 다른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으나 이 역시 파괴력이 부족해보이긴 마차가지다. 국민의당 이상돈 의원은 이날 평화방송 라디오와의 전화연결에서 “민주당 김종인 전 대표가 반 전 총장과 손을 잡으면 세력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이투데이는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전 비대위 대표가 2월 초에 대선 출마를 포함한 정치구상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구체적 내용은 그간 예견됐던 바와 유사하다. 여기에는 개헌과 함께 대통령 임기를 3년으로 단축해 2020년에 총선과 대선을 같이 치른다는 계획 역시 포함돼있다고 한다.

그런데 김종인 전 대표의 이후 행보 역시 반기문 전 총장이 얼마나 돌풍을 일으키느냐, 또 정계개편의 소용돌이가 얼마나 커지느냐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는 게 문제다. 정계개편론자들은 2월이 되면 자신들의 구상에 본격적인 힘이 실릴 것으로 자신하고 있으나 반기문 전 총장 외에 어떤 유력한 대권주자도 없는 상황에서 이런 구상이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즉, 각 대권주자의 지지율 확보가 충분치 못하면 정계개편의 파괴력은 반감되고, 정계개편이 별볼일 없는 모양새가 되면 각 대권주자들이 지지세를 확장시켜나갈 수 없는 악순환인 셈이다. 이런 악순환에 빠졌을 때에는 유력 대권주자가 판을 흔들고 뒤집을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귀국 이후 이해할 수 없는 행보로 봤을 때는 반기문 전 총장 등과 같은 사람들이 이를 잘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오른쪽)와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15일 오후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학교 성미가엘성당에서 열린 故 신영복 선생 1주기 추모식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인 문재인 전 대표의 상태를 ‘대세론’으로 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나오는 중이지만, 문재인 전 대표가 아닌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쉽게 대답할 수 없는 현실이 이어지고 있다. 본인들은 부정하지만 더불어민주당 내 다른 대선후보들에 대한 일종의 ‘밀약설’이 나오는 것은 문재인 전 대표에 대한 정치적 지지가 대세론에 근접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서 ‘밀약설’의 내용은 문재인 전 대표가 대권을 잡는 것을 전제로 이재명 성남시장이 서울시장직에 도전하기로 했다거나 안희정 충남지사가 4년 중임 개헌 이후 치러질 대선에 도전하기로 했다는 식이다.

결국 현재의 국면은 대권구도가 문재인 전 대표와 비-문재인 그룹 간의 양자구도로 굳어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비-문재인 그룹에서 가장 유력한 것은 반기문 전 총장이지만 귀국 이후 일어난 일들은 그가 곧 스스로 자멸할 수 있다는 불길한 예감을 갖게 한다. 반기문 전 총장이 무너진다면 노선과 가치가 아니라 이런 저런 각자의 정치적 사정을 조합해 세력을 만드는 정치도 당분간은 생명력을 잃게 될 것이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의 탄생이 새롭고 바람직한 정치의 탄생에 해당하게 될 것인지는 아직 의문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는 그야말로 정치의 황혼을 지켜보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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