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사건의 윤곽이 거듭 드러나고 있는 가운데, 세간의 시선은 다시 최순실 씨의 전 남편인 정윤회 씨로 옮겨지고 있다. 2014년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이 재조명되면서 국정농단의 또 다른 한 축으로 정윤회 씨가 다시 지목되고 있기 때문이다. 12일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4차 변론기일에 출석한 증인들은 이른바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을 전후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들을 언급했다.

이에 앞서 11일 TV조선은 정윤회 씨가 이른바 십상시로 불린 청와대 직원들과 함께 모임을 가진 장소로 알려진 식당 주인 등을 취재해 당시 문제가 된 문건의 내용이 사실에 가깝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이와 관련해 당시 문건의 존재를 단독보도 했던 세계일보의 조현일 기자와 조한규 전 사장 등은 12일 탄핵심판 4차 변론기일에 출석해 당시 상황을 상세히 증언했다.

조현일 세계일보 기자가 12일 오후 '정윤회 문건' 보도와 관련한 청와대의 언론보도 개입 의혹에 대해 증인신문을 받기 위해 '탄핵심판 사건 4차 변론'이 열리는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정윤회 문건’ 보도 이후 청와대의 조직적 언론탄압 재확인 돼

우선 조현일 기자는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박관천 전 경정이 이 의혹에 대한 취재를 말렸다고 설명했다. 당시 박관천 전 경정이 “이 보도를 하면 당신이나 세계일보, 통일교 재단까지 그 보복을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보복이란 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순수한 수준이 아니다”라는 등의 경고를 했다는 것이다.

조현일 기자는 또 자신이 경고에도 불구하고 취재에 들어가자 박관천 전 경정이 “당신은 3년 정도 검찰에 불려갈 각오를 해야 하고 세계일보와 통일교는 세무조사를 받아야 할 것이다”, “예전 같으면 종교는 건드리지 않지만 이 정권은 다르다. 종교도 건드린다”, “당신은 청와대 어느 특정 수석실과 싸우는 게 아니라 청와대 전체와 싸우게 될 것”, “조응천 공직기강비서관, 남재준 국정원장, 이재수 기무사령관이 정윤회 씨의 행적에 의문을 품었다가 모두 잘렸는데 당신이 뭐라고 총대를 메느냐”는 등의 발언을 했다고도 증언했다. 이러한 발언의 일부는 이미 세계일보의 지난해 보도에도 포함돼있는데, 헌법재판소에 당사자의 ‘증언’의 형태로 제출됐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또, 조현일 기자는 박관천 전 경정의 경고대로 세계일보에 건강보험공단 등 공공기관 광고가 1년간 중단되고 4개 계열사가 세무조사를 받는 등의 사건이 이어졌다고 진술했는데, 박관천 전 경정의 경고와 묶어서 보면 청와대가 세계일보에 대한 조직적 언론탄압을 주도했다는 해석을 추가로 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정황은 지난해 언론을 통해 알려진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에도 드러나 있다.

조현일 기자는 지난해 9월 사정당국 관계자가 자신이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고도 증언했다. 이 사정당국 관계자의 국정원 소속 지인이 “지켜보고 있다”, “이유는 본인이 알 것”이라는 등의 발언으로 사찰을 암시했다는 것이다. 이는 세계일보가 ‘정윤회 문건’을 보도한 이후 2년이 지난 시점까지도 정보기관이 세계일보 관계자를 주시해왔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세계일보에 청와대가 물리적 압력을 행사한 정황은 이날 증인으로 출석한 조한규 전 세계일보 사장의 증언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조한규 전 사장은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김종 전 문체부 차관 중 1명이 자신에 대한 해임 압력을 통일교 재단 측에 행사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한규 전 사장은 2015년 2월 세계일보 사장직에서 해임됐다.

또, 조한규 전 사장은 김상률 전 교문수석이 2015년 연락을 해와 식사를 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언론을 담당하는 홍보수석이 아닌 교육부와 문체부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교문수석이 접촉해온 것이 ‘압박’으로 느껴졌다고 발언했다. 세계일보 뿐만이 아니라 통일교 재단 및 이들이 관계하고 있는 13개 학교 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조한규 전 세계일보 사장이 12일 오후 '정윤회 문건' 보도와 관련한 청와대의 언론보도 개입 의혹에 대해 증인신문을 받기 위해 '탄핵심판 사건 4차 변론'이 열리는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조한규 전 사장은 “공공기관 이용한 광고탄압, 종교탄압과 특별세무조사 등이 어떻게 대통령의 허락없이 이뤄질 수 있겠나”라면서 세계일보에 대한 언론탄압이 대통령의 지시로 이뤄졌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조한규 전 사장은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에서 보듯이 청와대는 세계일보 공격방안을 논의하는 등 언론자유억압 조치를 일삼았다”라고도 주장했다.

재차 드러나는 ‘정윤회 문건’ 사건의 진상

한편 조현일 기자는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 당시 박지만 EG회장에게 일부 문건을 보여줬다고도 진술했다. 불순한 세력이 개입했는지 등에 대한 걱정 때문에 보안 관련 조치를 요구하기 위해 대통령의 친동생에게 일종의 ‘제보’를 따로 해줬다는 것이다.

이 같은 증언은 사건 당시 청와대가 조응천 당시 공직기강비서관(현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과 박관천 전 경정이 박지만 회장을 등에 업고 ‘문고리 3인방’과의 권력쟁투를 벌이기 위해 문건을 유출했다는 식의 프레임을 짠 것에 근거가 부족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드러낸다.

이후 이런 지적이 당사자와 세계일보 등을 통해 제기되자 청와대는 다시 당시 조응천 비서관과 박관천 경정이 포함된 ‘7인회’ 등 모임의 존재를 언급하며 유사한 의혹을 재차 제기하기도 했다. 이후 검찰은 문건 유출 당사자로 서울지방경찰청 정보분실 소속의 두 경찰관을 지목했고 이 중 한명은 청와대의 회유 사실을 보여주는 메모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러 언론은 당시 민정비서관으로 재직했던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박지만을 등에 업은 조응천의 모략’이라는 프레임 설정을 주도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후 문건유출 사건 관련 재판 과정에서 조응천 의원이 박지만 회장에게 메모 형태의 문건 6건을 전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는데, 본인은 이를 “박지만 회장 부부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정보를 제공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응천 의원은 1심과 2심에서 대통령기록물 유출 혐의 등과 관련해 무죄를 선고받은 상태다.

세계일보의 정윤회 문건 보도 당시 정황에 대해서는 조한규 전 사장도 상세히 증언하고 있다. 조한규 전 사장은 이날 ‘정윤회 문건’에 등장하는 내용의 상당 부분은 안봉근 전 비서관으로부터 유출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건 유출 사건 당시 세계일보는 안봉근 전 비서관이 동향 출신인 박동렬 전 대전지방국세청장에게 상당량의 정보를 제공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당시 또 다른 언론 등은 최순실 씨의 소유 빌딩에서 의류업을 하던 김 모씨를 또 다른 ‘소문’의 진원지로 지목하기도 했다.

정윤회씨가 박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일본 산케이신문 가토 다쓰야 전 서울지국장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기 위해 2015년 1월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당시 검찰은 이와 관련해 박동렬 전 청장을 소환조사 했다. 그러나 검찰은 앞서 보도 내용 등에도 불구하고 문건 내용에 대해 “신뢰할 만한 출처나 근거가 없음에도 박관천이 박동렬로부터 들은 풍문과 정보 등을 빌미로 과장 및 짜깁기하고 정윤회의 언동인 것처럼 덧씌워 사실과 다르게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고 결론 내렸다. 당시 검찰이 안봉근-박동렬-박관천으로 이어진 정보 전달 루트 중 안봉근 전 비서관 대목만 제외한 걸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안봉근 전 비서관은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 박동렬 전 청장을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후 밝혀진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에는 ‘박동열 전 국세청 지방청장 건-안봉근’이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이 메모가 작성된 당시 안봉근 전 비서관에 대한 의혹은 언론을 통해 보도된 사실이 없다. 결국 청와대가 사전에 이미 문건의 형성 경로를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한 대목이다.

당시 상황을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서는 안봉근 전 비서관의 증인 출석 등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이러한 일이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일부터 안봉근 이재만 전 비서관 등에 증인출석요구서 전달을 시도하고 있으나 이들의 소재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에 헌법재판소는 경찰에 이들의 소재 파악을 요구했다. 그러나 12일 경찰은 이들의 현재지와 행선지 등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헌법재판소에 통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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