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보수정치의 장점을 이상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현실을 보는 현실론에서 찾는다. 그런데 최근의 정국을 보면 보수정치의 그런 장점은 온데간데 없다. 나라를 내팽개치고 자기들 살 길만 찾고 있다. 이런 혼란이 금방 끝날 것 같지도 않다. 이런 무책임한 세력이 10년이나 정권을 독점했다니, 불행도 이런 불행이 없다.

10일 진행된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3차 변론기일은 또 핵심 증인들이 불출석한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다. 국정농단 의혹의 한가운데 있는 최순실 씨는 9일 특검 수사에 출석하지 않은 데 이어 이날 대통령 탄핵심판 변론기일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특검에 제출한 불출석 사유서에는 11일 형사재판 일정과 함께 10일 탄핵심판 일정도 명시돼 있었으나,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불출석 사유서에는 11일 형사재판 일정이 근거로 돼 있었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돌려막기’라는 비아냥까지 나오고 있다.

최순실 씨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온갖 민감한 기밀자료를 유출한 당사자로 지목된 정호성 전 비서관 역시 자신의 형사재판 일정을 이유로 탄핵심판 3차 변론기일에 불출석했다. 국회 탄핵소추위원단은 정호성 전 비서관의 불출석을 정당한 사유에 의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강제구인의 필요성을 주장했으나 헌법재판소는 19일 오전 10시에 정호성 전 비서관을 재소환하기로 결정한 상태다.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10일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3차 공개변론을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상황이니 헌법재판소도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날 박한철 헌법재판관은 “앞으로는 시간 부족 사유로 입증이 지연되는 일이 없도록 양측 대리인이 각별히 유념해달라”면서 “지난 3차례 변론준비기일과 2차례 변론기일을 거치는 동안 양측 대리인에게 의문점 설명을 요구했고, 개별적 구체적 증거 설명과 의견 제시를 수차례 촉구했으나 일부분을 제외하고 아직까지 그에 대한 설명이나 의견을 밝히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양측을 모두 겨냥한 듯한 발언이지만 사실상 박근혜 대통령 측이 ‘지연작전’에 나서고 있다는 인식을 보여준 걸로 풀이할 수 있다. 이날 변론기일에 박근혜 대통령 측은 이른바 세월호 참사 당일 7시간 동안 대통령의 행적에 대한 답변서를 제출했는데, 헌법재판소는 이에 대해서도 “좀 부족하다”고 반응하고 있다.

한가한 박근혜 대통령 측의 대응과는 달리 특검 수사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10일 연합뉴스 등은 박영수 특검팀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제3자뇌물수수가 아닌 뇌물죄를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에 대한 국민연금의 찬성 표결의 대가라는 의혹을 받는 삼성의 최순실 씨 일가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직접적인 이득을 안겨줬다는 것이다.

이러한 혐의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씨가 사실상 경제적으로 한 몸이라는 사실이 입증돼야 한다. 특검이 박근혜 대통령의 제부가 되는 신동욱 씨를 참고인으로 소환해 조사한 것은 이런 맥락에 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특검은 삼성그룹의 주요인사들에 대한 강도 높은 소환조사를 강행했고 언론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소환조사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전망까지 내놓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스스로 자신하는 대로 그 누구의 사적 이익을 위해 권한을 남용한 일이 없다면 스스로 철저한 수사의 대상이 될 것을 자처해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검찰 조사를 거부한 데 이어 특검 조사까지 거부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언론에 주고 있다.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스스로 언제든지 특검 수사에 응하겠다는 발언을 했음에도 탄핵심판에 출석한 대리인단을 통해서는 특검이 정치적으로 편향돼있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뇌물죄의 경우 뇌물수수자와 공여자를 모두 수사해야 혐의가 적용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이날 보도된 특검의 새로운 수사 전략이 박근혜 대통령 측의 대응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는 지켜볼 문제다.

박근혜 대통령 측이 무책임한 시간끌기로 일관하는 가운데 추가적인 의혹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문제에도 연루됐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특검과 국회 국정조사특위는 이른바 블랙리스트가 실재하고 이를 근거로 정부 지원에서 배제된 문화예술인이 존재한다는 점을 확인했다.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9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7차 청문회에서 의원들의 거듭된 질문에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질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이었고 이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된 조윤선 장관은 9일 국정조사특위 청문회에 출석해 위증죄를 피하기 위한 온갖 동문서답을 동원한 끝에 결국 블랙리스트의 실존 사실을 인정했다. 비록 본인이 직접적으로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과정에 연루됐다는 점은 밝히지 않았으나 특검 수사가 추가로 진행되면 사건의 정확한 윤곽이 나올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지는 대목이다.

이에 앞서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블랙리스트 관련 지시를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내린 정황에 대해 폭로했는데, 당시 언급을 보면 박근혜 대통령이 이 지시에 직접 관련됐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10일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창작과 비평’, ‘문학동네’ 등의 출판사를 지목해 예산 지원을 삭감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진술을 특검이 확보했다고 보도했다. 경향신문은 같은 날 박근혜 대통령이 문화체육관광부의 ‘우수도서’ 사업에 ‘문제 서적’을 선정해선 안 된다는 취지의 지시를 내린 사실을 특검이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상식적으로 이는 사실상 블랙리스트 관련 지시로 볼 수 있는 사안이다.

국회가 제출한 탄핵소추안에 대해서도 세월아 네월아로 일관하는 박근혜 대통령이 이러한 의혹에 대해 성실히 소명할지는 의문이다. 탄핵심판일정이 한정 없이 늘어지는 동안 동아시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파탄일로다. 장기집권과 개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소녀상 문제를 핑계로 한국을 ‘먹튀’ 취급하며 자신의 외교적 실패를 만회하려 시도하고 있다. 앞으로 트럼프 정권을 상대해야 하는 중국은 한국과 일본의 방공식별구역을 침범하며 사실상 군사도발 수준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이런 혼란 속에서 보수언론은 정부와 정치권에 박근혜 정권의 외교안보 정책 노선을 유지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결정을 강요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보수세력의 누구도 진지하게 문제를 해결하거나 국익을 책임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위상이 애매해진 집권 여당의 상태도 마찬가지다. 9일 새누리당은 무산 위기에도 가까스로 상임전국위를 열어 비대위를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진통 끝에 가결된 것에 비하자면 인적구성이 초라하기 그지없다. 인적청산의 대상인 서청원 의원은 아직도 농성(?) 중이다. 이들의 극성지지세력은 스스로 자멸한 보수정치의 문제는 외면하고 JTBC 손석희 사장 등을 대상으로 ‘남 탓’만을 하고 있다. 그야말로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다. 이런 무책임한 세력이 사실상의 정권재창출에 성공하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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