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시민적 저항이 계속되면서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또 이를 통해 얻게 된 교훈을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여러 견해들이 오가고 있다. 3일 중앙일보 지면에 실린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와 송호근 서울대 교수의 대담은 최근 정국에 대한 정치사회적 통찰을 안겨준다.

최장집 교수는 대의민주주의의 작동을 더 원활히 하기 위한 여러 사회적 조건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설명을 내놨고, 송호근 교수는 기성정치권이 촛불 시위 등을 통해 새롭게 나타난 시민적 요구를 대변하기 위해 변해야 한다는 주문을 내놨다. 두 사람의 상황 해석은 언뜻 보기에 상충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같은 지점을 보고 있다는 점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기성 정치의 실패다. 최장집 교수의 경우 제도적 민주화 이후에도 우리 사회가 권위주의와 집단주의로 요약되는 박정희 체제를 극복하지 못한 탓에 대의민주주의의가 허약한 형태로 작동돼 왔다는 문제의식을 말한다. 송호근 교수는 그간 작동해 온 한국의 정당정치가 시민을 대변하는 데 실패했고 한계를 드러냈다고 주장한다.

현실정치가 민의를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의제가 어떻게 하면 민의를 완벽하게 대변하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물음은 정치가 영원히 풀어야 할 숙제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대의민주주의의 명백한 후퇴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문제의 보편성보다는 특수성을 상기하게 한다. 이러한 특수성의 구체적 예로 언론이 언급하는 것은 선진국에서 극우정치의 부상, 영국의 브렉시트, 미국 대선에서의 도널드 트럼프 당선 등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기성 정치가 민의를 대변하지 못해 다수의 대중들로 하여금 ‘대안 없는 대안’을 선택하도록 내몬 것으로 묘사된다.

기성 정치가 민의를 대변하지 못하는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겠지만, 통치의 문제가 대다수의 대중들로부터 유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 사회적 조건의 변화 덕분에 오늘을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대다수는 더 이상 언론을 언론의 방식으로 접할 수 없는 위치에 서게 됐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은 사회적 공동체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 아니라 파편적이고 일회적인 해석을 강화했다. 기성 정치는 이런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정파적 이득을 위해 활용하는 데 골몰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새해 첫날인 1일 오후 청와대 상춘재에서 출입기자단과 신년인사회를 겸한 티타임을 갖고 참석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정권 실패의 처음과 끝이 모두 현대 정치의 이러한 속성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통치자로서 또 정치적 지도자로서 자질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정치가 끝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고야 말았다는 사실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다. 보수정치의 핵심은 이미 이를 알고 있거나 또는 예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권력의 쟁취 또는 유지를 위해 박근혜 정권을 탄생시켰다. 이를 위해 인터넷과 SNS를 포함하는 매스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음은 물론이다.

박근혜 정권의 핵심들이 민감한 정치적 사건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이런 점은 잘 드러난다. 가장 명백한 예는 세월호 참사이다. 세월호 참사는 그간 한국 사회를 규정해 온 기성 체제가 가진 문제가 한 번에 만천하에 드러나는 충격적 사건이었다. 여러 음모론을 배제하고 보더라도 세월호 참사는 안전이 이윤에 희생돼서는 안 된다는 대원칙이 일탈적 개인이 아니라 체제에 의해 훼손됐다는 점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진상을 규명하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비상한 대책이 필요하고, 이를 만드는 것과 관철시키는 모든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건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바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은 애초에 ‘비상한 대책’을 구상한 적이 없다. 고심 끝에 해경을 해체한다는 ‘비상해 보이는 대책’을 마련했을 뿐이다. 새누리당 소속 의원들은 세월호 참사의 의미를 단지 ‘교통사고’ 정도로 축소했다. 새누리당 일부 지지자들은 SNS를 통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장기간 단식을 진행한 김영오 씨를 비롯한 유가족들을 오로지 돈만 아는 파렴치한들로 만들었다. 세월호 참사는 이런 방식으로 정파적 문제가 됐고 박근혜 정권은 정치적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박근혜 정권의 기만적 태도는 유승민 의원에 대한 정치적 핍박에서도 드러난다. 유승민 의원이 원내대표로서 제기한 ‘중부담 중복지로의 변환’ 문제는 명백한 정치 노선의 문제이다. 이것이 새누리당 내에서 정책과 노선에 대한 건전한 논쟁으로 이어졌다면 보수정치는 실패를 딛고 일어설 가능성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이 유승민 의원을 ‘배신의 정치’로 지목하며 그의 불순한 ‘의도’를 문제 삼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관이 ‘건전한 나’와 ‘불순한 너’라는 유아적 형태로 형성돼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사건이다.

최근의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은 여기서 말하는 ‘건전한 나’라는 개념마저도 기만적으로 형성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사람들이 흔히 믿는 대로 정치가 명분과 당위를 기만적으로 제시하면서 뒤로는 사익을 추구하였다는 사실이 확인되고야 만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통치는 대중으로부터 더욱 심각한 형태로 유리됐다. 만일 2017년 대선에서 각 정치세력이 정치에 대한 불신과 환멸을 만회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후과를 가장 파국적인 형태로 치르게 될 것이다.

결국 정치의 본질을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정치를 일상화하고 사회를 재조직해 통치와 대중의 거리를 다시 좁히는 일이다. 송호근 교수가 말하는 기성 정치의 변화가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대중이 일상적으로 통치에 참여하는 모델을 정치가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다면 지금의 난국을 풀어가는 하나의 열쇠가 되지 않을 리 없다. 구체적 방법론을 만들기 위해선 유럽에서 대중정당이 뿌리내렸던 배경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지역공동체의 존재가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사회민주주의의 시대에 대중정당은 시민이 통치에 개입하는 하나의 유력한 통로였다.

둘째는 파괴된 담론의 영역을 다시 복구하는 것이다. 정치가 화자의 의도만을 추적하고 대중의 소비주의적 의식이 이에 호응해 발달하면서 비평과 토론을 가능하게 하는 공적 영역은 소멸 직전에 이른 상태다. 이런 환경에서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무엇인지, 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논하고 정치가 이를 반영하는 과정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 대중의 요구를 통치로 관철시켜야 하는 정치의 역할이 붕괴하는 셈이다. 최장집 교수가 말하는 ‘자유주의적 전환’이란 결국 여기에 해당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즉, 담론의 영역을 복구하는 것은 정치가 자기 역할을 다하게 하는 일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촛불집회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2017년의 정권교체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다. 이 시작의 한 걸음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대권주자들이 어떤 정치를 선보일 것이냐에 달렸다. 언론은 담론을 주도하는 하나의 주체로서 이를 강제할 책임이 있다. 그런 측면에서 시대의 정신을 묻는 이러한 여러 시도는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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