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수신료 현실화 쟁취' '공영방송 사수'가 적힌 대형 플래카드 아래로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본부장 박승규) 조합원 1500여명이 깃발을 들고 머리띠를 두른채 속속 자리를 잡았다.

▲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는 8일 수신료 현실화 쟁취와 무능 경영진을 규탄하는 비상총회를 가졌다. ⓒ서정은
이날 '공영방송 사수 및 임단협 총력투쟁 결의대회'에 참여한 KBS본부 조합원들은 다음과 같은 구호를 외쳤다

'수신료 인상안의 국회 문광위 상정을 강력 촉구한다' '무능경영 적자경영 정연주 사장은 각성하라'

구호에서 드러나듯 이날 비상총회는 '수신료 현실화'를 가로막는 걸림돌로 한나라당과 정연주 사장을 지목했다. 박승규 본부장의 투쟁사도 수신료 인상안의 국회 상정을 지연시키고 있는 한나라당을 압박하는 한편 수신료 인상 추진을 빌미로 조합 활동에 "걸림돌이 되고" "경영 실패를 자초한" 정연주 사장에게 화살을 돌렸다.

박 본부장은 이날 한나라당을 향해 "수신료 인상은 대한민국 공영방송의 생존이 달린 문제"라며 "집권하면 KBS를 입맛대로 요리하겠다는 정치적 계산으로 접근하고 있다. 남은 정기국회에서 수신료 안건을 상정하지 않으면 KBS 조합원들은 이번 대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를 심판하지 않을 수 없다"고 경고했다.

▲ 조합원 비상총회에 참석해 구호를 외치고 있는 박승규 KBS본부장 ⓒ서정은
박 본부장은 "수신료 인상안이 10월에 상정됐어야 연내 처리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남은 시간 최선을 다하고, 이번 정기국회에 안되면 내년 임시국회에 또 한번 승부를 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27년만에 추진한 수신료 인상이 물거품이 된다"고 강조했다. 사실상 수신료 인상의 연내 처리가 어렵다는 상황 인식이 깔려있다.

박 본부장은 곧이어 정 사장의 편파방송 시비와 부실 경영도 심판의 대상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노사관계가 격화되면 수신료 인상에 걸림돌이 될까봐 그동안 노동자의 기본 권리조차 주장하지 않고, 정 사장에 대한 비판도 참고 참았다"며 "그러나 책임 떠넘기기를 좋아하는 정 사장은 이 상황을 즐기면서 노조의 무한희생만 강요하고 있다. 법인세 환급이 없었다면 지난해 적자가 분명한데 부끄러워할 줄도 모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울러 "수신료 국면이 지금처럼 어려운 것은 정 사장 때문"이라며 "편파시비와 코드시비를 불러일으키며 정치적 논쟁을 일으킨 것이 누구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이날 박 본부장의 발언은 현재 수신료 국면에서 KBS본부가 처한 복잡하고 미묘한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복지대박' '코드박살' 구호를 내걸고 출범한 현 노조 집행부는 수신료 국면과 맞물리면서 그 어떤 것도 회사쪽으로부터 확실하게 얻어내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KBS 내부 개혁과 고통분담을 요구하는 사회적 여론을 모르지 않는 노조로서는 수신료 인상을 추진하면서 임금을 인상하기 어려운 형편이고, 그렇다고 해서 수신료 인상을 위해 노사가 한 목소리를 내며 손을 잡기엔 정 사장과의 '관계개선'도 이뤄지지 못했다.

만약 수신료의 연내 처리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있다고 판단했다면 이날 조합원 비상총회에는 "수신료 현실화" 구호가 더 넘실거렸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사실상 올해는 수신료 인상이 힘들다는 판단을 한 것이고, 따라서 한나라당을 계속 압박하면서도 '잘 풀리지 않는' 수신료 문제와 그로 인한 임단협 '부실'의 책임을 정 사장에게 돌리며 그동안 "참았던" 불만과 불신을 표출한 셈이다.

▲ 8일 오후 열린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조합원 비상총회 ⓒ서정은
실제로 지난 7일 KBS PD협회의 긴급 총회에서 오간 이야기도 KBS 내부의 고민과 논란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8일 발간된 KBS PD협회보에 따르면 이날 총회에 참석한 박승규 본부장이 "수신료 인상안의 국회 상정 촉구와 함께 경영진의 무능과 무책임 또한 조합원 비상총회에서 강력하게 물을 것"이라고 밝히자 이에 대해 PD들의 우려섞인 질문이 쏟아졌다.

이날 PD들은 "노조 집행부가 올해 예상되는 700억원 적자에 대해 경영진의 책임을 물을 수도 있겠지만 이럴 경우 수신료 현실화의 명분으로 제기되고 있는 KBS 재원의 구조적 위기 문제와 상충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아직 국회의 공식 일정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노조가 연내 수신료 인상안의 국회 승인이 어렵다고 공공연하게 인정하는 것은 문제"라는 우려도 나왔다.

KBS본부 집행부 내부에서도 조합원 비상총회의 성격과 방향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KBS 한 관계자는 "수신료 국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노조가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조합원 비상총회의 성격을 '수신료 현실화'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임단협이 지지부진한 상황에 큰 부담을 느끼면서 '무능 경영진 심판'도 같이 거론된 것"이라고 전했다.

KBS본부 조합원들은 이날 2시간 동안 비상총회를 마치고 국회 앞으로 이동해 간략한 규탄집회를 가진 뒤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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