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4년 봄,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의 후폭풍은 수 계산에만 능한 프로 정치꾼들의 한심한 인식능력을 폭로했다. 주권자인 국민이 탄핵소추를 그저 ‘게임’으로 볼 거라는 전제를 깔고 일을 저질렀는데, 주권자들은 그걸 자신들에 대한 ‘겁박’으로 읽었다. 자신들이 직접 뽑아 1년 남짓 지난 대통령을 임기가 두어 달밖에 남지 않은 묵은 대의제 권력이 억지 논리를 들어 축출하려 했으니, 주인이 화를 내는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역으로, 레임덕에 들어선 대통령이 새로 구성된 국회를 해산하려 해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주인의 심기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건 시간밖에 없었지만, 불행하게도 선거가 코앞이었다. 탄핵소추를 밀어붙인 축들이 대부분 바짝 엎드려 있을 때, 한쪽에선 뜬금없이 불가의 수행법인 삼보일배 선거운동을 들고 나왔다. 맥락이 뒤틀린 촌극이었지만 애끓는 몸의 읍소는 그나마 눈물겨워 보였다. 그러다 정동영의 이른바 ‘노인 비하 발언’이 터졌다. 숨소리도 못 내고 있던 마름들이 ‘주권 강탈보다 나쁜 패륜’을 들이대며 다시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대로 열린우리당에 국회의석을 싹쓸이해줄 것 같던 분위기는 덕분에 과반을 조금 넘게 밀어주는 수준에서 가까스로 멈췄다.

지난주 검찰의 ‘박연차 게이트’ 수사 결과 발표 방식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조중동과 수구보수 진영의 대응 방식은 2004년 대통령 탄핵소추 세력들의 대응 방식과 자주, 그리고 넓게 겹친다. 5년 전 탄핵소추 사태를 복기하며 나름대로 전략을 구상했을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을 거둘 수 없다. 그러나 역사가 똑같이 되풀이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착시의 결과다. 무늿결이 비슷하다고 같은 자리는 아니다. 대응방식 역시 아무리 흉내 내려 해도 똑같을 순 없다. 주체가 다르면 모방도 귀가 틀어지게 되어 있다.

▲ 한겨레 6월 13일자 3면.

검찰의 전략은 ‘모호성’에 있다. 노 전 대통령 서거로 창졸지간 궁지에 몰린 검찰은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들릴 듯 말 듯 ‘포괄적 뇌물죄’를 웅얼거렸다. “증거 관계 설명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공개될 관련 참고인들의 사생활과 명예가 훼손될 우려가 높기 때문”이라고 토를 달며, 구체적 내용과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호성 안에는 칼날이 들어 있었다. “제반 증거에 의하면 노 전 대통령의 피의 사실이 인정된다”고 했다. 에둘렀으나, 혐의를 단정한 것이다.

검찰이 이렇게 발표하려면 적어도 노 전 대통령이 재직 중 640만 달러의 실체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검찰 수사는 고인의 인지 여부를 조사하는 단계에서 멈췄고, 당시까지 ‘부인과 자식이 돈 받은 걸 몰랐을 리 없다’는 가부장주의적 정황논리 말고는 아무것도 내놓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유서와 측근들의 증언에서는 그가 ‘처자식의 돈거래도 몰랐던’ 지질한 가부장이었을 단서들이 엿보인다.) 그런데도 검찰은 “역사적 진실은 수사기록에 남겨 보존된다”며 자신들의 수사행위와 기록을 은근슬쩍 사초(史草)의 반열에 올려놓은 뒤 자물쇠를 걸어 잠갔다. 드러난 건 그들의 웅얼거림뿐이다.

5년 전 총선을 코앞에 두고 추미애 민주당 선대위장은 사흘 동안 삼보일배를 했다. 그는 대놓고 탄핵소추 강행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묵언수행했다. 그의 전략도 ‘모호성’에 터하고 있었다. 삼보일배를 마치고 광주 망월동 5·18 국립묘지에서 발표한 ‘국민께 드리는 말씀’에서도 끝내 “도와주십시오. 민주당을 부활시켜 정의로운 역사를 쓸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힘을 모아 헤쳐나가겠습니다”가 전부였다. 모호한 신비주의 상징장치를 동원했지만, 그나마 그는 읍소했다. 사헌부가 승정원까지 겸하며, 속에 칼을 감춘 채 ‘현재의 권력행위’를 ‘역사의 기록’으로 멋대로 전치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러고도 눈 속에 대가리를 처박은 꿩마냥 뒤가 하늘을 향해 훤히 열려 있으니, 검찰의 험한 앞날이 내다보인다.

2004년 정동영 당시 열린우리당 당의장의 ‘노인 폄훼성 발언’의 본질은 ‘말실수’였다. CBS, iTV, 국민일보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대학생 총선기자단과의 인터뷰에서 “정치에 무관심한 젊은 유권자들에게 한마디 해달라”는 요구를 받고 “노인들은 투표장에 안 가도 된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젊은 유권자들의 적극적인 투표를 촉구한다는 게 노인들을 폄훼하는 꼴이 됐다. 정치인, 더구나 당대표에게 말실수는 실수로 끝나지 않았다. 탄핵 후폭풍에 짓눌려 한나라당 지지를 유보하고 있던 보수층 유권자들에게 심리적 지렛대가 됐고, 탄핵소추 주체들과 조중동에게는 탄핵의 폐허를 가리기 위한 장막이 됐다. 이들이 동원한 전략은 ‘데시벨 높이기’다. 소리와 소리는 문맥으로 조우하지 않고 오로지 물리적으로 부딪쳤다.

▲ 경향신문 6월 12일자 4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른바 ‘독재’ 발언에 대해서도 비슷한 전략이 구사되고 있다. 그의 발언에 대한 공격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거세게 불고 있는 반 MB·반 한나라당 후폭풍을 잠재우려는 노림수다. 정권을 규탄하는 목소리에 논리로 대응하지 않고 전혀 문맥이 닿지 않는 더 큰 소음을 일으켜 덮으려 하고 있다. (전여옥 의원 지지자 모임 회장이라는 자가 ‘김대중은 자살하라’고 주장한 것은 전술적 오류다. 노 전 대통령의 ‘비극’을 떠오르게 하는 어떤 상징 기제도 정권에게는 불리하다.) 조중동과 한나라당은 오로지 김대중 전 대통령 한 사람에게 몰입해, 나이까지 들먹이며 노인 폄훼성 모욕을 가하고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이에게 이념을 색칠한다.

물론 이런 소음이 굳이 사실에 근거할 필요는 없다. 아무리 추억의 ‘이명래 고약’ 같은 선전술이라도 약발이 전혀 안 듣지는 않을 것이다. 벌써부터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열혈 노인들의 출몰이 잦아지고 있다. 하지만 정동영의 노인 폄훼 발언과 김대중의 독재 발언은 같은 계열에 놓일 수 없는 발언이다. 노인 폄훼 발언이 발언 당사자 처지에서는 백 번이라도 입을 꿰매버리고 싶은 말실수였다면, 독재 발언은 정교한 전망을 거쳐 작정하고 내지른 정치선언이다. 그 발언에 말을 보태면 보탤수록 발언 당사자가 바라는 프레임으로 가는 것이다.

투표 행위는 당장의 위험부담이 적기에 심리적 기제만 주어지면 곧바로 ‘바람’으로 나타날 수 있다. 2004년엔 그러고도 과반수 이상 국회의석을 열린우리당에 내주었다. 김 전 대통령의 발언은 대응하면 할수록 전선만 명확해진다. 겉으로는 맥락 없는 소리와 소리가 부딪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으로는 민주-반민주가, 상식-몰상식이, 대중-강부자가, 주인-마름이 부딪치고 있다. 그렇게 재편된 정치·사회 공간은 한쪽에는 너른 대지이고 다른 한쪽에는 가파른 협곡이다. 그것이 바로 조문 정국 너머를 내다보는 노회한 정치인의 노림수다. 이번에도 조중동과 한나라당은 얕은 수 계산에 빠져 한심한 현실 인식능력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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