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위는 던져졌다? 박근혜 대통령이 시정연설에서 드디어 ‘개헌’을 언급했다. 심지어 ‘임기 내’에 한다고 한다. 비장의 카드를 꺼낸 것이다. 이로써 지금까지 야권이 제기했던 최순실 씨 모녀 및 우병우 민정수석 문제는 ‘1면’에서 밀려날지 관심이다.

박근혜 정권은 그간 정치권의 개헌 논의를 사실상 막아왔다. 중요 고비마다 구체적인 모델이 거론되기도 했으나 경제활성화 등에 집중해야 할 때라는 이유로 논의를 거부한 것이다. 그러던 상황에서 개헌 필요성을 공식적으로 또 공개적으로 제안한 것은 이제부터 ‘개헌블랙홀’을 열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보여준 걸로 풀이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구체적으로 특정한 권력 체계 모델을 제안한 바는 없다. ‘정책의 연속성’ 정도가 눈여겨 볼만한 키워드다. 박근혜 대통령은 미국식의 ‘4년중임제’ 모델을 선호하는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번 시정연설에서 이를 못 박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른바 분권형대통령제나 내각제 등의 모델을 총망라한 논의가 펼쳐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이 24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이 현재 개헌 논의에 불을 붙여 얻을 수 있는 정치적 효과를 엮어서 보면 이후 과정에 대한 전망이 가능하다. 개헌은 보수세력을 표면적으로 결집시키는 효과를 불러올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최순실 씨 모녀 문제와 우병우 민정수석 문제가 여론의 관심에서 밀려나는 데다, 비박계도 장기간 개헌 필요성을 주장해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현재 ‘제3지대’에서의 새로운 정치구상을 펼치겠다는 이유로 세력화를 모색하고 있는 정의화 전 국회의장이나 아예 개헌을 주요 정치적 목표로 내걸고 창당을 모색하고 있는 이재오 전 의원 등도 논의에 참여가 가능하게 됐다. 개헌 필요성은 이명박 정권 때도 제기됐다. 구체적으로는 이원집정부제 등의 분권형대통령제다.

최근 이명박 전 대통령은 여러 언론을 통해 차기 대권 구도 등과 관련해 자기도 뭔가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 23일 한국경제를 통해서는 “보수세력이 단결해야 해. 무언가 계기가 있겠지. 정권을 넘겨줄 수는 없지 않나. 지금 투표하면 70%가 저쪽으로 가겠지. 어떤 사람은 내게 인내심도 참 많다고 비꼬지만 그래도 단결해야지. 무언가 계기가 오지 않겠어?”라고도 말했다. 이런 맥락을 보면 이명박 전 대통령 역시 개헌 관련 논의의 전면에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친박계의 경우도 최근까지 일종의 분권형대통령제로의 개헌을 모색해온 걸로 알려져 있다. 구체적으로는 대통령이 외치를 맡고 총리가 내치를 담당하는 등의 모양새다. 박근혜 대통령이 언급하는 것처럼 임기 내 개헌이 완료될 경우 ‘반기문 대통령-TK 출신 총리’라는 모양으로 권력분점이 이뤄질 가능성이 점쳐졌다.

그러나 최근 친박계는 분권형대통령제 또는 이원집정부제로의 개헌까지는 동의한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다. 맥락 상 ‘친박 독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반기문 대통령-TK 출신 총리’ 구상에 대한 언급은 자제하기로 한 걸로 읽힌다. 친박과 비박이 권력을 분점하는 구상을 만들 가능성이 남아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을 고려하면 대권레이스를 앞두고 분열해왔던 친박과 비박이 개헌 논의를 명분으로 손을 잡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최근의 개헌 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사 중 하나는 손학규 전 의원이다. 손학규 전 의원은 정계복귀를 위해 연 기자회견에서 ‘제7공화국’을 언급하며 헌법 개정 필요성을 제기했다. 구체적인 권력 구조 모델을 언급한 것은 없으나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그가 쓴 책인 <강진일기>에 등장하는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에 대한 대목이다. “10년 가는 정권을 만들자”며 협력을 요구하였다는 것인데, 여기서도 분권형 개헌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일부 언론은 구체적으로 5년씩 번갈아가며 권력을 분점하는 모델을 언급하기도 했다. 처음 5년은 손학규 대통령-안철수 총리, 다음 5년은 안철수 대통령-손학규 총리 체제를 모색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구상은 안철수 전 대표가 개헌 논의에 대한 유보적 입장을 표명하면서 실현 가능성이 일단은 없어졌다.

그러나 어쨌든 개헌을 고리로 한 정계개편 추진 외에는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현재로선 없기 때문에, 손학규 전 의원 입장에서도 개헌 논의에 적극적으로 끼어들 수밖에 없는 국면이 됐다. 일각에서는 손학규 전 의원이 문재인 전 대표의 더불어민주당이나 안철수 전 대표의 국민의당에서 주도권을 쥐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결국 여권행을 선택할 가능성도 있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개헌 논의를 통해 여권 중심의 정계개편이 이뤄진다면 이러한 시나리오도 가능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한국경제를 통해 내놓은 발언에는 손학규 전 의원에 대한 본인의 생각도 표현돼있다. “손학규? 거 참. 그 사람, 한나라당에 있었으면 벌써 대통령 후보가 됐을 텐데…. 반기문? 그 사람은 그래도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 수많은 평가 절차를 거쳐서 저 자리까지 올라갔으니까. 사람(자질)도 좋고. 충청도 사람들이 이번에는 꼭 우리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라는 게 그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비박계의 이런 저런 대권주자들이 존재하는 상황임에도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 대한 견제가 별로 없다는 거다. 이 발언과 박근혜 대통령의 개헌 논의 제안, 친박-비박의 관계, 이후 정치일정을 묶어서 생각해보면 또 다른 황당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또 다른 황당한 결론’에 이르기 위해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공헌한 대로 ‘임기 내 개헌’이 완료될 수 있는가를 따져야 한다. 행정부가 개헌안을 만들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국회의 논의를 반영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정치권의 지난한 논의를 거쳐야 한다. 여당은 물론 야권에도 개헌에 긍정적 입장을 갖는 인사들이 많으나 유력 대권주자인 문재인, 안철수 전 대표와 같은 사람들은 개헌 논의에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이다.

정치권이 요구하는 바가 세부적 내용에선 제각기 다를 것이라는 점도 문제다. 이를테면 충청권은 지방분권을 강화하는 내용을 전통적으로 넣고 싶어 한다. 이런 온갖 어려움을 뚫고 개헌을 발의하는데 성공한다 해도 국민투표에서 통과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정치권은 이런 이유 때문에 그간 ‘2년 임기 대통령’의 선출 역시 언급해왔다. 현실적으로 임기 내 개헌은 힘들기 때문에 개헌을 위한 대통령을 선출하고 대신 임기를 단축해서 2020년 국회의원 선거와 선출 일정을 일치시키자는 거다. 이렇게 되면 2017년에 선출하는 대통령의 임기는 2년 남짓에 그치게 된다. 즉, 이런 시나리오 대로라면 2020년까지 반기문 대통령이 개헌 절차를 완료하고 이후 일종의 ‘재경기’를 하는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여기까지 오면 이제 ‘황당한 결론’이 눈에 들어온다. 2020년의 박근혜 대통령은 아직도 70세가 안 된 상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74세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박근혜 대통령과 동갑인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2000년부터 2008년까지 두 번에 걸쳐 대통령을 한 후 연임 제한을 2012년까지 총리를 한 번 맡는 걸로 비켜갔다. 그는 2012년 이후 다시 대통령직을 맡았고 지난 9월 러시아의 집권여당은 개헌선을 훌쩍 넘긴 의석수를 확보했다. 2020년 이후 한국과 러시아의 정상회담 테이블에 지금과 같은 사람들이 앉을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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