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국가인가”라는 탄식은 박근혜 정부의 실정을 대표하는 슬로건이 됐다. “이게 국가인가”라고 한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야 한다. “이게 국가인가”라는 말 속에 일종의 시대정신이 압축돼있기 때문이다.

일전에 박근혜 정권이 이명박 정권과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썼다. 사익을 중심으로 뭉친 이명박 정권과는 달리 박근혜 정권은 공적권력과 이에 대한 충성심이 중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으로 보면 박근혜 대통령은 결혼도 하지 않고 형제들과도 먼 사이이기 때문에 친인척 비리도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최근의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 때문에 보수세력도 실망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수행지지율은 사상 최저 수준을 찍었다. 영남과 고령층이라는 ‘콘크리트 지지층’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20일 지면에 “황교안 국무총리 아니면 이원종 청와대 비서실장이 사표를 들고 대통령을 만나 ‘이래서는 안 됩니다’하고 고언해야 한다”고 썼다. 이 칼럼을 쓴 양상훈 논설주간은 송희영 전 주필이 ‘부패기득권 세력’으로 찍혀 나갈 때 긴 반성문(?)을 썼었다.

보수세력도 실망하고 있는 것은 박근혜 정권이 정파적 이해관계를 넘어 최소한의 차원에서 통치를 책임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세력의 ‘책사’로 평가되는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박근혜 정부에 대해 “국가성을 상실한 정권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을 것 같다”며 “이미 무능함과 무책임을 드러낸 이 정부에 반등의 기회는 없다”고 말했다. 즉, 보수세력마저 등을 돌리게 만든 ‘국가란 무엇인가’란 의문은 무능과 무책임으로 설명할 수 있다.

무능과 무책임은 정확히 말하면 국가를 운영하는 것, 즉 ‘통치’의 문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통치는 필연적으로 공적 영역에 대한 의지를 담보한다. 어디까지나 현대정치의 이상적 맥락에서 국가와 사회는 공공선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통치는 공공선을 국가가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이다.

“국가성을 상실했다”는 윤여준 전 장관의 평가는 결국 박근혜 정권이 통치를 포기했다는 이야기로 귀결된다. 박근혜 정권이 통치가 아니라 결국 이명박 정권과 마찬가지로 ‘사익 추구’에 진력하였다는 점은 최근의 ‘최순실 게이트’를 통하여도 여실히 드러나는 바다. 아니, 오히려 ‘최순실 게이트’는 사익을 국익으로 치환하고 국가 권력 전체를 사익추구를 위한 도구로 쓴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는다는 점에서 과거 정권들의 문제와도 차원이 다르다.

이를테면 과거 정부들의 측근·친인척 비리는 이윤을 추구하는 어떤 사람들과 결탁한 일부의 일탈이 문제였다. 이명박 정권만 해도 대통령이 국가를 이윤축적의 수단으로 생각한다는 주장은 일종의 ‘비평’에 가까운 문제였을 뿐이며 부실한 대형 사업과 그에 따른 비리, 반대파에 대한 도를 넘은 정치공작 등이 문제가 됐을 뿐이다.

그런데 ‘최순실 게이트’는 아예 이 나라 통치의 정점인 대통령이 ‘비선 실세’를 적극적으로 비호하면서 그가 기획하는 모든 문제를 주도적으로 실행할 수 있도록 모든 편의를 봐줬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최근 각 언론들은 대기업들의 돈을 뜯어 만든 두 이상한 재단들의 자원이 결국 ‘비선실세’라는 최순실 씨 모녀의 행복을 위하여 투입됐다는 의혹을 앞 다투어 제기하고 있다.

최순실 씨의 딸인 정유라 씨가 K스포츠재단으로부터 나온 세탁된 돈을 통해 독일에서 호텔을 매입해 살고 있고 K스포츠재단 관계자가 이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가 속속들이 나오고 있다. 전통의 명문 이화여대는 최순실 씨의 딸인 정유라 씨 한 사람을 감당하지 못해서 총장이 불명예 퇴진하는 사태까지 겪고 있다. 이화여대에 몸 담고 있는 교수들은 “4·19 때도 한 적이 없다”는 시위를 학생들과 함께 벌이고 있다. 삼성과 같은 대기업 등이 정유라 씨의 승마선수로서의 활동을 전폭 지원하였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최순실 씨는 자기가 미르·K스포츠재단을 좌지우지하였다는 의혹에 대해 “나라를 위해 한 일인데 뭐가 문제냐”고 했다는데,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보면 결국 정유라 씨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고 성공하는 것이 곧 국익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국민이 선출되지 않은 인물의 성공을 국가적 수단을 통해 뒷받침하고 있는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19일 구미 새마을 중앙시장을 방문, 시민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청와대는 이 모든 의혹에 대해 “일방적인 의혹 제기에는 답하지 않겠다”며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제기한 의혹에 해명이 있어야 ‘일방적’이지 않게 된다는 건 상식이다. 청와대는 “증거가 없지 않느냐”라고 하는데 제기된 의혹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증거를 찾는 건 언론이 아니라 수사기관이 할 일이다. 언론은 나름의 저널리즘적 원칙을 통해 공론을 조성하고 권력을 견제하는 걸 본령으로 하고 있다. 조선일보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그들이 우병우 민정수석 관련 의혹을 제기한 건 그래서 언론으로서의 제 할 일을 다 한 것이다. 반면 ‘우병우 무혐의’라는 한 꼭짓점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행진하는 수사기관의 행보는 파탄 그 자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이런 상태가 이어지면 한국 정치는 망한다. 권력의 노골적 사익 추구가 무서운 점은 반대파가 실권을 잡았을 때 똑같은 수단으로 보복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 사회는 냉소주의의 논리를 통해 굴러간다. 오늘날 냉소주의의 대표적 논리 중 하나는 당혹스럽게도 ‘나에게 금지된 것은 너에게도 금지되어야 하고, 너에게 허용된 것은 나에게도 허용되어야 한다’는 거다. 야당 소속의 모 전직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이 우리가 나중에 집권해서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오히려 늘려주고 있다”고 자조 섞인 목소리로 발언했다. 박근혜 정권이 한 모든 일들이 ‘전례’가 될 것인데 도대체 이를 어찌할 것인가.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 논란이 색깔론의 범위를 넘는 문제로 봐야 하는 것인 이 때문이다. 송민순 전 장관과 참여정부 출신 인사들 간의 갈등은 대북정책에 대한 철학의 문제에 불과하다. 이는 정책적 토론을 통해 극복해야 할 문제다. 그런데 보수세력은 이를 어떤 진실게임의 문제로 만들어 버렸다. ‘진실게임’의 전제는 참여정부가 겉으로는 평화를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북한의 이익에 복무하였다는 것이다. 이제 야당이 집권해서 보수정권의 대북정책을 어떤 정책적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본인들의 사익추구 욕망에 의한 결론이었음을 주장한다면 도대체 어찌할 것인가.

정책의 내용이 아니라 서로의 의도와 사익의 추구만을 탓한다면 남는 것은 오로지 상대를 짓밟아 아기는 것, 즉 힘과 힘의 대결 뿐이다. 이걸 대중이 이미 체현하고 있기 때문에 ‘헬조선’ 담론이 등장하고 ‘각자도생’만이 답이라고들 하는 거다. 힘의 대결만이 반복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국가성’을 되찾을 수 없다. 박근혜 정권은 ‘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지금까지 ‘국가성’을 지탱해 온 마지막 보루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이제 ‘통치’는 불가능하다. ‘통치불가능’은 절대적인 약육강식의 세계다. 이런 사회를 기어코 만드는 것은 역사적 범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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