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는 국회의원을 지낸 코미디언 이주일 씨가 정계은퇴를 선언하면서 한 말이다. 요즘 이 말을 자주 떠올린다. 정부 여당의 청와대 및 비선실세 논란을 방어하기 위한 ‘색깔론’ 육탄돌격이 매일 같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백해무익한 논쟁이 오늘도 지속된다.

여전히 보수언론들은 이 문제를 ‘진실게임’ 양상의 관점으로 보도하고 있다. 유엔 대북인권결의안 표결 방침 결정이 이루어진 게 2007년 11월 16일인지 18일인지에 초점을 맞춰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 측 입장이 엇갈리는 듯 보도하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16일에 기권을 결정했다면 북한에 이에 대한 입장을 밝힌 게 ‘사후통보’가 되고, 18일에 결정했다면 ‘김정일 재가’가 된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6일이냐, 18일이냐’라는 물음 자체가 이미 우문이다.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는 19일 YTN라디오와의 전화연결에서 “기권을 하기로 서로 간에 합의를 했다면 합의한 당사자는 북한에서 총살당했을 것”이라면서 “(북한 입장에선) 기권이 아니라 반대를 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애초에 여당 일각이 표현하는 대로 북한의 지시에 의해 표결 방침을 정하는, 즉 주권국가로서의 권리를 포기하였다면 기권이라는 방침 자체가 나올 수 없었다는 얘기다.

문제의 특성상 표결 방침을 결정하는 게 최종적으로는 대통령의 마음에 달린 일이라는 것도 ‘16일이냐, 18일이냐’라는 물음을 우습게 만든다. 16일에 기권으로 결정을 했다 하더라도 표결 당일인 20일이 되기 이전에 대통령이 마음을 바꾸면 과정 상 무리가 있더라도 참모진과 장관들 입장에선 재론을 하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기권을 주장한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16일에 결정된 사항에 송민순 전 장관이 반발해 20일까지 공식 발표가 안 됐다고 설명할 수 있고, 송민순 전 장관의 입장에선 자기가 합의를 안 해줬기 때문에 ‘북한에 물어보자’는 얘기가 나왔다는 18일까지 결정이 안 됐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16일이냐 18일이냐는 중요한 문제가 전혀 아니다.

새누리당이 주장하는 ‘북한재가설’이 황당무계한 주장이라는 걸 고려하면 이 논란을 이 정도까지 키울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게 여실히 드러난다. 이 주장의 근거는 어쨌든 송민순 전 장관의 회고록이니 내용을 볼 필요가 있다. 다행히 송민순 전 장관 회고록의 해당 부분은 한국일보가 인터넷에 전문을 공개해놓고 있다.

송민순 전 장관의 회고에 따르면 15일에 안보정책조정회의에서 이미 기권이 다수 의견임이 확인됐다. 송민순 전 장관은 이 회의에 대해 “회의는 파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라고 쓰고 있다. 이 대목에 대해 참여정부 인사들은 일반적 상황이라면 안보정책조정회의의 다수의견을 대통령이 추인하는 게 관례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사안의 성격 상 송민순 전 장관이 기권에 동의하지 않으니 16일에 대통령이 관계자들을 모아 다시 한 번 토론을 시켰다는 것이다. 송민순 전 장관은 “결론을 낼 수 없었다”고 하지만 다수파인 기권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송민순 전 장관이 소수파로서의 입장을 굽히지 않은 것이다. 송민순 전 장관이 16일 밤에 대통령에게 찬성 표결을 해야 한다는 요지로 장문의 편지를 쓰면서 ‘북한에 물어보자’는 얘기가 나왔다는 18일 회의가 다시 예정된다.

송민순 전 장관의 18일 회의에 대한 회고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구동성으로 왜 이미 결정된 사항을 자꾸 문제 삼느냐고 불만을 터뜨렸다.” 즉, 기권 방침이 이미 다수 의견이었고 이 회의가 자신을 제압(?)하기 위한 것임을 송민순 전 장관도 인지하고 있었다는 거다.

송민순 전 장관의 찬성 표결 논리는 이렇다. 북한인권결의안의 수위 조절을 위해 그동안 한국 정부가 나서서 여러 애를 써왔다는 걸 북한도 알고 있으며, 그럼에도 찬성을 전제로 수정안을 마련하는 것에 반발하고 있어 설득을 하는 과정에 있다는 거다. 즉, 해석하자면 찬성 표결을 하더라도 남북관계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는 주장이다. ‘북한의 의견을 확인해보자’는 김만복 전 국정원장의 제안은 이 주장에 대한 반응으로 나왔다. 즉, ‘확인’의 맥락은 새누리당 일각이 주장하는 것처럼 ‘어떻게 표결할까요’라고 묻는 게 아니라 ‘찬성 표결을 양해하겠느냐’에 가까웠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러니까 북한이 20일 문제의 ‘쪽지’를 통해 ‘찬성 표결은 싫다’는 입장을 전해온 거다. 어떻게 이걸 두고 ‘내통’이라느니 ‘김정일 아바타’라는 주장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송민순 전 장관 회고록에 나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도 이런 맥락을 뒷받침 한다. 송민순 전 장관 회고에 의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북한에 묻지 않고 찬성표결 한 후 장관을 경질할까도 생각했다”, “물어까지 봤으니 기권으로 가자”라고 했다고 한다. 송민순 전 장관 논리대로 한국 정부가 수위를 낮춘 수정안을 스스로 준비했고 이의 정당성을 외교통상부가 북한에 설득하는 과정을 그대로 이어갔다면 찬성표결에 나름 일관된 맥락이 형성됐을 텐데, 북한이 굳이 찬성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전달하게 자초해놓고 찬성표결을 하는 건 외교적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즉, 한 마디로 요약하면 ‘송민순 장관 손을 들어줄까도 생각했지만 애초에 쉽지 않았고(경질해야 하니) 괜히 북한에 찬성 표결에 대한 입장을 물어서 더 어려워졌다’는 거다.

물론 이 당시의 판단이 옳았는지, 이 표결에 대한 ‘기권’이 이후 남북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정책적 토론이 가능한 문제다. 그러면 그 토론을 하면 된다. 그게 아니라 사실관계를 교묘히 비틀어서 색깔론을 펴는 것은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일이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18일 오후 충북 괴산군 괴산농공단지 내 아이쿱 생협에서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물론 의혹 제기의 당사자인 문재인 전 대표의 대응이 논란의 불씨를 키우는 측면도 있다. 문재인 전 대표가 당시 찬성 표결 입장이었다는 것은 이 문제에 관여한 참여정부 관계자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런데 이 주장의 근거를 흔든 게 문재인 전 대표 본인이라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렵다. 문재인 전 대표는 17일 “기억이 나지 않지만 기권을 주장했을 것 같은데 찬성을 했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내가 인권변호사 출신이라서 인권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나 송민순 전 장관 논리에 넘어간 결과일 것”이라는 애매한 발언을 내놨다.

이런 말은 ‘정치인의 발언’으로 볼 수가 없다. 추정하기로 문재인 전 대표는 실제로 기억을 제대로 못할 것이다. 왜냐면 이런 말은 해봐야 득될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참여정부 당시 청와대 비서실은 3실장(비서실장, 안보실장, 정책실장) 체제였고 이 문제의 책임은 안보실장이 지게 돼있었으므로 문재인 전 대표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참여정부 인사들의 설명에도 일리가 없는 게 아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언제까지 이렇게 비정치적인 방식으로 현안에 대응할 것인지 의문이다. 보수언론과 새누리당 일각에서 ‘같은 상황에서 또 북한에 물어보고 표결하겠다는 거냐’고 묻고 있는데 이에 대한 답은 명확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첫째, 요즘 같은 상황이면 물어보지 않는다. 둘째, 대북정책은 대화와 타협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는 입장에 변화 없다. 셋째, 참여정부 대북정책의 실효에 대해선 앞으로 기회가 될 때마다 토론에 응할 의사가 있다.

그러나 문재인 전 대표는 이 문제에 대해선 일절 대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언급을 하면 할수록 수렁에 빠지게 됐던 이른바 ‘NLL 대화록’ 문제를 상기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예 말을 하지 않겠다는 게 과연 해결책이 되겠는가.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권은 대선 직전까지 ‘종북 공세’를 계속할 것이다. ‘혼자 떠들게 놔두자’는 것이면 적어도 정치적으로 명민한 다른 ‘액션’을 취해 판을 엎어야 한다. 이대로 있으면 ‘문재인이 벌써 대통령 다 된 듯 몸조심 한다더라’는 식의 부정적 인식만 확대될 뿐이다. ‘일절 대응하지 않겠다’는 게 ‘오히려 나서면 사고를 친다’와 정치적 대구(對句)를 이루면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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