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시대를 맞아 역대 가장 깨끗한 정권이 될 거라고 자부했다. 그 말을 사실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물러날 때도 자기가 역대 대통령 중에 가장 깨끗하다고 했다. 역시 그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은 아직도 여러 의혹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주변에서도 마찬가지로 ‘역대 가장 깨끗한 정권’이 될 거라는 얘기가 나왔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지만 씨와 박근령 씨가 있긴 하지만 과거 육영재단 사태 때부터 서먹한 사이가 됐다는 점을 고려해야 했다. 2014년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에서 “피보다 진한 물도 있더라”는 얘기가 나온 걸 보면 대통령의 형제들이 소외돼 있었던 건 맞는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하면 바로 그 순간부터 뭔가 ‘비리’가 시작되는 게 대한민국 권력의 작동 원리다. 임기 중반을 지나기 시작하면 대통령직 인수위에 참여했던 인사들부터 슬슬 흔들리기 시작하고, ‘황태자’나 ‘집사’란 별칭으로 불렸던 인사들이 삐걱대기 시작하고, 정권 말기가 되면 드디어 친인척 비리가 이 모든 것을 아울러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이를 역순으로 추적해보면 대한민국 권력이 어떤 방법으로 ‘해먹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새로운 정권에서 새롭게 추진하는 사업을 결정하면 거기에 권력의 힘이 실리게 되고, 이걸 이용해서 한탕 해보려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이 한탕 해보려는 사람들이 정치권에 줄을 대고, 그 중에 가장 권력의 심부와 밀접한 ‘친인척’과 가까워지는 사람이 실제로 ‘한탕’을 하게 된다.

최근 미르·K스포츠 재단 문제 역시 이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문화융성’은 창조경제와 함께 박근혜 정권의 주요한 국정 기조였다. 문화융성이란 구호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창조경제에 필요한 콘텐츠 중심 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보니 문화융성이란 취지로 진행된 주요 핵심 사업은 거의 없다시피 한 걸로 드러났다. CF감독 ‘황태자’ 차은택 씨가 자기 주변 인물들을 활용해 여러 사업을 독점한 것 정도다.

최근 제기된 최순실 씨를 중심으로 한 의혹들은 다른 정권에서 벌어진 친인척 비리와 같은 것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최순실 씨는 과거 ‘영애’란 호칭으로 불릴 때부터 박근혜 대통령을 보좌해왔다. 육영재단 사태로 박근혜 대통령이 박지만, 박근령 씨와 갈등을 빚을 때에도 한결 같이 곁을 지켰다. 그야말로 ‘피보다 진한 물’이다. 이렇게 보면 ‘영애님’이 대통령이 된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는 사실 안 봐도 비디오다.

박근혜 대통령이 12일 오전 청와대에서 루이스 기예르모 솔리스 코스타리카 대통령 내외를 영접하기 위해 현관으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뻔히 예상되는 사태를 정권이 특별히 방지하려 노력하지 않은 그 심보가 궁금하다. 그렇게 레임덕을 경계하던 박근혜 대통령은 미르·K스포츠 재단 문제 때문에 그야말로 정치적 ‘늪’에 빠졌다. 여야를 넘어 전경련을 해체하라는 주장이 나오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12일 국정감사에 출석한 전경련 이승철 상근부회장은 “물의가 일어나 국민에게 송구하다”고 했다.

이런 경우 보통 관행적으로 쓰는 말은 ‘물의가 일어나 송구’가 아니라 ‘물의를 일으켜 송구’이다. 즉, 이승철 부회장이 하고 싶은 말은 ‘내가 물의를 일으킨 것도 아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어쨌든 미안하다’란 뜻이다. 이걸 맥락에 맞춰 일상어법으로 바꾸자면 ‘내 탓이 아니다’란 얘기가 아니겠는가.

심지어 대통령이 이런 상황을 경계하기는커녕 부추긴 정황도 나온다. 한겨레는 대통령이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 2명에 대한 퇴직을 사실상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과거 최순실 씨의 딸인 승마선수 정유연(정유라로 개명한 것으로 추측) 씨가 2013년 국가대표선발을 겸한 전국승마대회에서 2위를 하자 박근혜 대통령이 해당 업무 책임자들을 ‘나쁜사람들’로 지목한 바 있는데, 올해는 심지어 “아직도 이 사람들이 있느냐”고 말했다는 거다.

청와대는 이에 대해 “문화체육관광부에 확인해보니 아니라고 한다”고 해명했다. 과연 청와대가 시키는 바에 따라 ‘블랙리스트’에 오른 문화계 인사까지 관리해야 했던 문체부가 “대통령이 퇴직을 강요한 거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런 뻔한 얘기를 ‘문체부에 확인해봤다’는 취지로 해명하는 청와대의 생각도 이해할 수 없다. 청와대는 그간 미르·K스포츠 재단과 관련해 제기되는 모든 의혹에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반응해왔다. 이제 네티즌들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말은 의혹이 사실이지만 내 입으로 인정하진 않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비아냥대고 있다.

국가공무원법은 공무원의 신분보장에 대한 조항을 분명히 하고 있다. 형을 선고 받거나 징계를 당하거나 본인이 그만두지 않는 한 휴직이나 면직이 될 수 없다는 거다. 이 조항은 권력자의 성향에 따라 공무원들이 ‘물갈이’되는 정실주의 또는 엽관주의의 폐해를 방지코자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이 사람들이 아직도 있느냐”고 한 게 사실이라면 이는 정실주의의 규정과 정확히 일치하는 행위이다. 즉, 위법이다.

이제 일반 대중들이 보기에 박근혜 대통령이 내세우는 명분과 당위는 그 본래의 의미와는 관계없이 오직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소셜미디어 등 인터넷 일각에서는 북한을 효과적으로 제재하기 위한 거였다는 ‘친중정책’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겨레가 보도한 리커창 중국 국무원 총리의 한중문화교류협력과 관련한 문제 때문이다. ‘대통령이 퇴임 이후를 위해 중국으로부터 2천억을 받으려고 전승절 기념 열병식에 참석하고 미르 재단을 만들었다더라’는 거다.

제기되는 의혹에 대해 제대로 된 해명을 하지 않는 청와대의 행보는 의혹을 더 키우고 황당한 주장까지 나오는 환경을 스스로 조성하고 있다. 이른바 ‘지라시’를 통해 유포되고 있는 ‘종교설’이 그것이다. 11일 CBS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출연한 정봉주 전 의원은 대통령과 최순실 씨의 관계에 대해 “개인적인 친분 관계를 떠나서 (최순실 씨의) 아버지 최태민 목사가 독자적인 종교를 갖고 있었다. 이런 종교적인 깊은 관계까지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도 많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 주간지를 발행하는 <선데이저널USA>도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런 주장을 우리가 사실로 인정한다면 결국 박근혜 대통령의 통치는 아주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작동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 전제 하에서는 어떤 정치적 논쟁이나 비판, 평론이 불가능하고 대중의 냉소만 확대된다. 냉소의 확대는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고 이는 오로지 힘으로 하는 대결로만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의 근거가 된다.

‘종교설’ 같은 것은 대통령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모욕’에 가깝다. 그러나 최순실 씨를 중심으로 한 ‘게이트’ 의혹이 해명이 되면 이런 황당한 의혹 제기는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다. 대통령이 언제까지 이런 상태를 방치할 것인지 궁금하다. 임기 말 친인척 비리와 ‘게이트’ 논란 때문에 역사에 오점을 남긴 과거 정권의 행태를 또다시 반복하고야 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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