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짓궂은 장난기도 섞였을 것이다. 승무원으로 근무 중인 최수아에게 서도우는 와인을 달라고 했다. 최수아는 참 많이 곤란하다. 하고 싶은 말은 최수아도 만만치 않게 많지만 지금 자신은 근무복을 입고 일하는 중인데, 그래서 이 남자가 그냥 모른 척 해줬으면 하는데 굳이 와인을 달라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최수아는 지금 당장은 고객인 서도우가 요청대로 할 수밖에는 없다.

그런데 설마 그럴 줄은 몰랐다. 와인잔을 잡은 서도우의 손이 예사롭지 않다. 어쩌면 서도우로서는 그 상황이 자신에게도 역시나 어색해서 그런 것일 뿐일 수도 있다. 그런데 와인잔을 어루만지는 서도우의 손길이 무척이나 관능적이었다. 착각이거나 망상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려는 순간 서도우의 손은 와인을 따르는 최수아의 손에 살짝 닿았다. 최수아는 숨이 멎을 듯했다.

KBS2 수목드라마 <공항 가는 길>

놀라운 연출의 힘이었다. 두 사람의 손과 와인 한 병 그리고 잔으로 이토록 관능적인 감정을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러고는 최수아가 다른 탑승객의 말을 듣는 순간을 노려 그녀의 등을 살짝 만지고 지나가는 서도우의 과감한 터치에 또 깜짝 놀란다. 캐빈에 들어가 서도우는 최수아에게 말한다.

“우리 간당간당하지 않나요?”

맞다. 그들은 아슬아슬하고 간당간당하다. 어떤 의미로든 그렇다. 그런데 그들뿐이 아니다. 그들을 지켜보는 시청자 역시 그렇다. 그 장면은 마치 작가가 시청자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장난스럽게. 어쨌든 그들이 서로를 만질까봐 걱정이다. 그러다 같이 잘까봐 더 두렵다. 그래서 여느 통속적인 불륜이 될까봐 정말 노심초사하고 있다. 물론 이 드라마가 그렇게 흐를 일은 전혀 없다. 장담할 수 있다.

KBS2 수목드라마 <공항 가는 길>

그 후로 한참 뒤에 최수아는 애니의 일을 고백한다. 애니가 서도우의 친딸이 아니라서 조금 덜 미안해도 되겠다는, 대단히 은밀한 자기 합리화에 아파하는 최수아에게 서도우는 말한다.

“수아 씨한테 버겁다는 그 감정들. 미안하지만 나한테는 지금 꼭 필요해요. 없음 안 돼요. 딸이 주고 간 선물이에요.”

그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것을 애써 숨기려 수아는 아무 말이나 한다. “한강 바람이 세서. 미안해요. 다시 전화할 게요” 바람.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그의 감정. 더 이상 거절할 힘을 잃은 수아였다. 결국 수아는 그 감정들을 더는 밀어내지 않기로 하고 한 가지 제안을 한다. 하나라고 하기에는 아주 많은 내용이지만.

KBS2 수목드라마 <공항 가는 길>

3무 사이. 즉 세 가지가 없는 관계를 제안한다. 바라지 않기, 만지지 않기, 헤어지지 않기. 그리고는 둘 사이를 규정하지 말기를 제안한다. 그저 잘 모르는 사이로 있자는 것이다. “사랑한다. 하물며 싫다. 어떤 말도 하지 말고. 아무리 감정이 확실해도 애매하게 둬요. 애매해야 오래 가요”라고 한다.

참 어려운 말이다. 말에 담긴 의미도 어렵지만 지켜지기는 더 어렵다. 세상에 이렇게 까다로운 연애 조건은 없을 것이다. 연애라면 누구나 하는,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들을 다 금지하잖다. 그렇지만 어느새 참 순수해진 시청자들은 그런 수아의 말에 눈물 날 정도로 동의할 것이다. 그들이 연애를 시작하는 것을 누구보다 바라지만 동시에 일반의 연애가 될까 두려운 시청자로서는 당연하다. 그래도 여전히 간당간당하다. 그래서 좋으면 이상한 걸까?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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