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주의 미학이라면 이럴 땐 비극적이되 장엄하고 숭고한 이미지라야 한다. 지금 한국의 대중매체들이 재현해내는 애도의 퍼포먼스가 꼭 그렇다. 톡톡 튀는 목소리로 오락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여성 아나운서는 라디오 뉴스에서 느리고 낮은 목소리로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신문 호외 편집도 더없이 무겁고 장중했다. 사람들의 보편적 심리상태도 그랬을 터였다. 그런데 지난 토요일 오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소식을 처음 듣는 순간, 숙취로 절여진 내 전두엽을 치고 간 건 드라마 소품처럼 사소한 기억이었다. 경악하고 애달파하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부조리해보였다. 내가 기억해낸 건 비교적 최근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어떤 예언이었다.

한 지인이 달포 전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을 단정적으로 예측했다. 그는 주위 호사가들로부터 ‘신기(神氣)’가 있다는 얘기를 자주 들을 만큼 앞날을 잘 예측한다. 그러나 난 그걸 예언이나 신기라고 보지 않았고, 다만 그의 직관력을 높이 샀다. 그는 직관적 예측을 내놓고, 조목조목 이유를 들어가며 논리로 뒷받침한다. 그가 말했다. “노무현이 가장 중시하는 건 명예다. 그는 명예를 잃었다. 살 이유가 없다.” 그때만큼은 나도 흘려들었다. ‘그런다고 자살까지야….’ 평소 그의 예측이 몇가지 제한된 경우의 수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다면, 이번엔 개연성이 극히 낮은 단 하나의 가설을 연역적으로 끼워 맞춘 삼단논법의 오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승부사 노무현’에게 자살이라니….

예측은 달포 뒤 적중했다. 이번 것은 내게도 예측이 아니라 진짜 예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예언이란 미래를 내다보는 전망이 아니라 미래를 현실로 이끌어내는 주술이 아닌가 싶어 오소소 소름까지 돋았다. 그러나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한 것은 예언이 아니라 역시 합리적 예측이었다는 쪽으로 생각이 선회하고 있다. ‘자살은 최후의 극단적 선택’이라는 통상적인 언설은 산 자들의 믿음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흔한 레토릭을 주워섬기려는 게 아니다.) 이는 ‘죽을 힘으로 살지 왜 자살했느냐’는 잔인하면서도 하나마나 한 충고만큼이나 죽은 자를 타자화한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꿋꿋하게 대응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고 했다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말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합리화의 언설인가. 그는 장수하다 끝내 자연사할 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에게는 제가끔의 동기와 심리상태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언론이 자살 동기를 죽은 자 본위로 추론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름 없는 이들의 자살 앞에서 언론은 그 동기를 매우 단선적으로, 심지어 폭력적으로 도출한다. 몸말(체언)은 하나 같이 ‘비관’이고, 그 앞에 ‘생활고’ ‘신병’ ‘실연’ 따위 몇가지 제한된 범주 안에서 기계적으로 선택된 매김말(관형어)을 갖다 붙인다. 얼마 전 언론정보학회 학술대회에서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이 ‘지하철 자살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날 사고로 열차 운행이 ○○ 동안 지연됐다”는 언론 보도의 스테레오타이프를 정식화해 눈길을 끌었다. (언론에게 이름 없는 개인의 자살은 ‘최후의 극단적 선택’이자 동시에 ‘열차 운행 지연’과 동격의 보도 가치밖에 없는 셈이다.)

언론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동기를 두고 이런저런 분석을 내놓고 있지만, 익명의 자살자에 대한 보도와 비교되는 건 양적 풍부함밖엔 없는 것 같다. 피붙이와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자신마저 검찰의 기소를 앞둔 상태에서 극도의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렸을 것이라는 분석이 한쪽 기둥을 이룬다면, 도덕성 하나로 자신을 차별화했던 정치인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자 절망에 빠졌을 것이라는 분석이 다른 한쪽 기둥을 떠받치고 있다. 그럴 듯하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을 무죄라고 생각했는지 유죄라고 생각했는지에 따라 자살 동기는 근본적으로 달라질 텐데, 이 부분에 대해 언론들은 아무 말이 없다. 죽은 자만 알고 있는 내용이니 별 수 없겠지만, 설령 언론이 알고 있다고 한들 자살 동기의 모자이크 그림을 완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림을 완성하려면 언론들은 먼저 이 물음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노 전 대통령은 목숨을 버림으로써 자신의 모든 것이 사라지기를 바란 것일까?

모든 자살은 느닷없는 것이며, 방아쇠를 당기면 격발되는 총알처럼 즉자적인 행위일까? 자살은 묘사의 대상일 뿐 결코 서사의 대상이 될 수 없는가? 문화평론을 하는 남재일은 “자살 동기는 한 개인의 생애 전체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명쾌한 규정이 불가능하다 (…) 한 개인이 삶을 마감한 이유를 단순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은 그 개인이 삶을 포기한 진짜 이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자살 동기라는 범주는 사실 산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등을 돌리기 위한 방패이다. 목숨을 끊어버린 사람에 대한 지독한 두 가지 궁금증-‘내 삶이 행여 저 죽음에 개입했을까?’라는 아련한 죄의식과 ‘저렇게 버릴 수도 있는 목숨을 나는 쓸데없이 꼭꼭 부둥켜안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무지에 대한 불안을 재빨리 없애주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모든 자살이 예외없이 ‘정치적/사회적 타살’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다수 자살은 정치적/사회적 타살이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은 ‘공적 행위’로써의 성격이 매우 강하다. 이런 자살일수록 남재일이 말한 첫 번째 ‘지독한 궁금증’(내 삶이 행여 저 죽음에 개입했을까?)은 극대화된다. (또한 모든 자살은 자기 본위적 자살이기도 하다. 그래서 두 번째 궁금증이 성립한다. 그러나 공적 성격이 강한 자살일수록 자기 본위적 성격의 콘트라스트는 약해지고, 이에 대한 궁금증의 자리도 줄어든다.) 그 무지의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또한 무지가 허용될 수 없는(모든 것을 다 안다는 신화 위에 군림하는) 존재로서의 조급함 때문에, 나아가 자신이 그의 죽음에 깊숙이 개입한 징후가 너무나도 또렷하기에, 언론은 노 전 대통령의 자살 원인을 자신의 알리바이(현장부재증명)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짧고 거칠게 규정했다.

자살도 선택이라고 했을 때, 이 또한 하나의 실천행위다. 모든 자살에는 메시지가 있다. 하다못해 ‘할 말 없다’는 메시지라도 담겨 있다. 자살은 당사자의 무언의 발언이다. 사회가 발언권을 허용하지 않거나 발언의 내용을 용납하지 않을 때, 누군가는 자살이라는 ‘해적방송’을 송신한다. 자살의 방식에 따라 당사자의 메시지와 발언의 강도에도 차이가 나는데, 투신자살, 특히 물이 아닌 바위나 콘크리트 같은 딱딱한 바닥을 향한 자유낙하는 낙하 이후 육체의 낭자함만큼이나 강한 메시지, 소리 없는 절규를 던진다. 정권과 조중동은 노 전 대통령의 메시지를 목숨을 던져 ‘화합과 단결’을 호소한 몸의 절규로 번역했다. 이런 아전인수를 위해 그의 자살 동기를 방아쇠와 총알의 관계로만 설명한다. 그의 생애가 과연 화합과 단결의 일대기였는가. 그의 자살을 예측했던 내 지인은 “노무현의 정치인생을 꿰뚫어 봤을 때 자살은 그에게 주어진 모든 조건 속에서 일관성 있는 선택이라고 봤던 것”이라고 달포 전을 돌이켰다.

모든 언론과 정치권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고 있다. 정권과 조중동도 뒤질세라 의관을 갖추고 조문 행렬의 앞에 섰다. 그러나 그들의 조사(弔詞)가 고인의 몫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몫이라는 건 확연하다. 상장례(喪葬禮)란 본디 고인의 ‘떠나는’ 행위 절차가 아니라 남은 자의 ‘보내는’ 행위 절차다. 규모가 큰 상장례일수록 죽음은 병풍 뒤로 멀리 밀려나고 일상의 삶이 넓게 자리를 편다. 지금 노 전 대통령의 상장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대립은 고인에 대한 기억을 한사코 지우려는 자들과 아프게 환기하려는 자들 사이의 대회전이다. 서울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차벽과 경찰력은 그 물리적 분단환선이자 인계철선이지만, 그것은 평화와 화합을 위한 선이 아닐뿐더러 양쪽 가운데 어느 한쪽만을 보호하고 지지하는 기우뚱한 선이다. 이 부조리한 풍경 앞에서 누가 고인을 더 추념하는지를 굳이 묻는 건 어리석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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