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관련 법안에 대한 국민 여론 수렴과 대안 도출을 위해 구성된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미디어위)는 활동시한을 한 달도 채 남겨놓지 않은 지금까지 한순간도 정상적인 활동을 해보지 못했다. 한국의 미래 미디어 지형은 물론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돌이키기 힘든 결정을 해야 하는 기구의 중간 성적표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하다. 이런 식으로 활동을 마치고 나면 그 폐해가 어디까지 미칠지 가늠하기조차 어렵지만, 지금 당장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미디어위 위원 자신들을 비롯한 지식인들이다. 이 분야의 ‘베스트 오브 베스트’만 추렸다는데도 이 지경이니, 이 나라 지식인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다는 오해를 살까 두렵다. 그들이 지식인 사회를 대표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추락한 평판은 지식인 사회 전체에 적용될 수밖에 없다.

▲ 지난 3월23일 출범한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 회의에서 위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여의도통신

미디어위를 싸잡아 비판하면 억울해할 위원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양비론이 본질을 흐리고 물타기에 악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미디어위 활동은 승패를 건 싸움이 아니다. 결과에 대한 책임은 여야를 막론하고 20명의 위원 모두가 질 수밖에 없다. 사회적 평가도 없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접는 게 좋겠다. 훗날 역사의 평가까지 받아야 할지 모른다. 위원회 안에서 본의 아니게 활동을 방해하거나 지연시키는 위원들이 있으면 그렇게 못하도록 잘 유도하는 것도 다른 위원들의 책임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양문석 위원의 발언은 돋보였다. “올 가을 MBC, KBS, EBS 등 공영방송 이사만 29석이 나온다…미디어위원 모두가 향후 1년간 언론 관련 임명직에 진출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지 않으면 정파적 행태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진단은 명쾌했다. 지난 5월8일의 일이다.

그런데 그 뒤로 감감무소식이다. 미디어위 활동이 정상화되려면 가장 시급한 것이 ‘언론 관련 임명직 진출 거부 선언’이라더니, 열흘이 넘도록 미디어위 정상화를 위한 첫 단추조차 꿰지 못하고 다시 허송세월을 한 셈이다. 양 위원이 그 뒤로 공식석상에서 그 발언을 되풀이했다는 얘기도 들어보지 못했다. 이래서야 알리바이 만들기나 천둥벌거숭이 소영웅주의라는 얘기를 들어도 할 말이 없지 않겠는가. 언론 관련 임명직 진출 거부 선언이 한국사회의 보편화된 관습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라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도 자신의 직전 직장이 무엇이었느냐에 따라 직업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규범은 이미 법으로 제도화됐으며, 헌법재판소로부터 합헌 판단까지 받았다.

그토록 상식적인 규범을 말하면서 무얼 그리 좌고우면하는 모습을 보이는가. 미디어위원이 선출직도 아니고, 그렇다고 관료들처럼 평생 뼈를 묻은 자리도 아닌데, 겨우 100일에 불과한 그 경력이 영전을 당연히 보장하는 통과의례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미디어위가 로또 복권 1등 당첨받는 자리가 아니라는 건 대중들의 가장 기본적인 법/제도 감정이다. 하물며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이 나라 미디어 지형의 앞날을 좌우하는 소명의 자리를 사적 욕망을 채우는 데 이용한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지만,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 번연한 순리조차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 같은 우수마발이 그동안 감정이입을 했던 게 아니길 바랄 뿐이다.

미디어 관련법안에 대한 국민 여론조사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의견을 수렴해 가장 현명하고 합리적인 제도를 도출하겠다며 출범한 국민대표기구가 여론조사를 하네 마네 하며 시간을 끌고 있는 모습을 상식이 있는 국민이면 어떻게 납득할 수 있겠는가. ‘국민 여론조사는 미디어위가 아니라 국회 교섭단체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여당 추천 위원들의 주장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것인지는 누구나 안다. 국민 의견을 수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국민에게 직접 묻는 것이다.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특별기구가 가장 기본적인 소명을 수행하기 위해 다시 대의민주주의의 틀에 의존해야 한다는 주장은 다이어트 한다면서 고기 잔뜩 먹고 소화제 털어 넣은 다음 러닝머신 위를 뛰어야 한다는 처방과 다름없다. 나는 야당 추천 위원들이 이 문제를 얼마나 정파적으로 접근했기에 내로라하는 지성인 여당 추천 위원들이 그런 주장을 다 하겠는가 싶기도 하다.

미디어위만큼 순리가 필요한 곳도 없다. 이 나라의 미래 방송 생태계를 좌우할 중대 사안이 정파적 이해와 자본의 이해에 의해 휘둘리지 않도록 하려면 우선 여당 추천 위원과 야당 추천 위원이라는 정파적 이분법부터 극복해야 한다. 그런 내부 만리장성의 주춧돌을 어느 쪽이, 누가 먼저 놓았는지는 모르겠다. 그걸 따져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미디어위가 기댈 곳은 오로지 국민의 뜻밖에 없다. 또한 이 나라의 국민 여론은 단순히 수의 우열을 따지는 것도 아니고, 서울과 수도권에 거주하는 지역민들의 목소리만 담는 것도 아니다. 모든 계층과 모든 지역의 구성원들, 이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모든 이들의 뜻이 과잉대표되거나 과소대표되지 않도록 수렴해야 한다.

미디어위 위원들이 당장 내놓아야 하는 것은 ‘지혜’밖에 없다. 정파적 이해를 대변해야 한다는 ‘인간적’인 부담감을 넘어서, 이 기구가 만들어지는 데 가장 많은 피와 땀을 쏟은 국민들을 위해, 다수결의 원칙이 갖는 기본적인 가치를 수용하되 숫자로 반영되지 않는 목소리까지 의미 없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살뜰한 의견 수렴의 틀을 만들기에도 미디어위에게 남은 시간은 너무 짧다. 시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건 역시 미디어위 위원들의 지식과 연륜에서 나오는 지혜다. 지금 국민들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놓고 미디어위에 크게 실망하고 있지만, 여야 할 것 없이 미디어위 위원들이 국민의 눈길을 조금만 의식한다면 탁월한 능력과 품성을 다시 발휘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6월 중순이 지나서도 지금 미디어위 위원들의 이름 뒤 괄호 속에 들어간 직함이 온전히 유지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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