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에서도 독자 반응이 가장 뜨거운 기사는 역시 연예 관련 기사다. 포털은 절대온도는 훨씬 높지만, 거대한 방문자 규모 덕분에 콘텐츠의 소비 식생이나마 다양한 편이다. 독자의 쏠림 현상은 규모가 ‘겸손’하면서 소재마저 진중한 매체들에서 오히려 심하다. 미디어스도 선정성을 배격하고, 사유적이고 메타적으로 연예 관련 기사를 다루려고 하지만, 결과는 다른 매체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연예 관련 기사는 내용과 상관없이 소재 자체가 이미 선정성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연예계(인)에 대한 쑥덕공론이 한국사회 담론 숲의 지배적 우점종이 된 세태의 한 삽화가 아닌가 싶다.

▲ 설경구-송윤아 결혼발표 기자회견 ⓒ 오마이뉴스

지난주 미디어스 방문자수를 끌어올린 1등 공신은 단연 설경구와 송윤아였다. 미디어스가 다룬 건 미디어를 통해 뿌려진 두 사람의 청첩장도, 그들의 알콩달콩한 또는 눈물 짜는 연애사도 아니었다. ‘설-송 결혼 반대, 파쇼적 여론재판’이라는 기사는 두 사람 결혼을 두고 벌어지고 있는 인터넷 일각의 여론을 비판했다. 이 여론은 네티즌의 통상적 쑥덕공론 수준을 넘어섰다. 설경구는 ‘불륜’과 ‘패륜’이라는 ‘공공의 적’으로, 송윤아는 ‘마녀’로 쇼윈도에 전시됐다. 익명의 필자가 쓴 일방적 내용을 기정사실화한 것도 문제였지만, 미디어스는 ‘사실’의 문제 이전에 연예인에게도 사적 영역의 보편적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는 데 방점을 찍었다.

연예계 기사에 주로 댓글을 다는 연령층과 직업층은 10대 청소년일 거라고 짐작해왔다. 나이주의(ageism)의 선입견이라고 비판받아도 딱히 할 말은 없지만, 미디어스가 드물게 써온 아이돌 스타 기사의 댓글에 새겨진 언어의 무늿결이나, 기사를 보고 전화를 걸어온 이들의 목소리와 말투 등으로 미뤄 크게 어긋난 짐작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 기사에 붙은 댓글들은 달랐다.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댓글들이 적잖이 눈에 띄는데, 대부분 ‘아줌마’였다. 이들 댓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명사는 ‘유부남’과 ‘조강지처’/‘자식’(또는 둘을 합쳐서 ‘처자식’), 동사는 ‘바람 피웠다’(또는 ‘버렸다’), ‘치떨린다’ 등이었다.

댓글들을 보면서 설경구-송윤아의 결혼에 아줌마들이 유별나게 관심이 많다는 것과, 그들은 연예인의 사생활을 저렴하게 ‘소비’하고 있는 게 아닐 뿐더러 두 사람에 대해 평판 달기를 넘어 진심으로 분개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특히, 그들의 공분 대상은 애초 두 사람의 결혼 발표 직후 유포된 전처에 대한 설경구의 ‘몸쓸 짓’에 관한 주장에서 ‘자식 딸린 유부남과 미혼녀의 사랑/결혼’이라는 관계 방식 일반으로 빠르게 이동/확산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들은 ‘아줌마’라는 자신들의 공통된 정체성을 설-송으로 상징화된 관계 방식에 ‘투사’하고 있는 셈이었다. 댓글 자체가 분석해 볼 만한 텍스트로 보였다.

▲ 미디어스 기사에 붙은 댓글 일부를 골라 재편집한 이미지

설-송의 관계를 향한 아줌마들의 태도는 한국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어떤 지배적 현상에 대해 직·간접적 당사자로서의 집단적 반응이다. 그 반응에는 아줌마들의 자기 정체성이 투사돼 물거울처럼 어른거리고 있다. 아줌마들에게 설-송의 관계 방식은 ‘가족의 안정성’을 해치는 파괴 행위다. 그들이 ‘치가 떨려’ 무서운 저주의 댓글을 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송윤아는 설경구의 전처에게서 사랑을 빼앗은 게 아니라, 남편을 빼앗고 자식의 아버지를 빼앗은 존재다. (댓글에 전처의 ‘실연’의 상처에 관한 얘기는 없다.) 설경구에게는 기존관계에 대한 ‘의무’와 새로운 관계로 맺어진 ‘사랑’ 사이 이항대립 위에서 후자를 고른 행위가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문제는 ‘소유’다.

그들이 설-송을 비난하는 건 ‘결혼서약의 신성’을 깨뜨린 행위에 대한 것은 아니다. 결혼서약은 근대의 낭만적 결혼관을 지탱하는 규범화된 선언이다. 근대의 낭만적 결혼관이란 연애 감정(사랑)은 결혼이라는 제도로 완성되고, 그 제도의 관문을 거치면서 시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영원으로 수렴된다는 믿음/제도의 체계다. 결혼서약은 그 주관적 감정(사랑)을 규범화-사랑해서 결혼했으면 죽을 때까지 사랑하라는-한 것이다. 결혼서약의 신성을 깨뜨린 행위를 문제 삼자면 결혼한 부부 가운데 어느 한쪽이라도 결혼 전만큼 상대를 온전히 사랑하지 않는 모든 관계에 적용되어야 한다. 결혼서약의 신성을 온전히 지키고 사는 부부가 얼마나 될지는 굳이 연구조사가 따로 필요없을 만큼 명확하다.

아줌마들의 반발은 ‘신규 관계’에 맞서 ‘기존 관계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것이다. 역사상 여러 시대와 문화권에서 존재해온 수많은 결혼제도들이 대부분 관계의 기득권을 옹호해 왔다. 하지만, 단혼제(monogamy)의 낭만적 결혼관은 ‘신규 관계의 출현’을 인정하지 않는 데 따른 모순이 다른 어떤 결혼관(제도)보다 심각하다. 다른 결혼관들은 대개 결혼의 목표를 계급 재생산에 두고, 결혼을 개인 대 개인이 아닌 집단 대 집단의 관계 맺기로 이해했기에 부부간 연애 감정의 존재나 지속성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신규 관계도 기존 관계의 기득권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인정돼왔다. 반면 낭만적 결혼관에서는 부부간 연애 감정의 지속성이 관계 유지의 핵심조건이고, 신규 관계에 대해서는 철저히 불관용적이고 비타협적인 태도가 유지돼 왔다.

▲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책 표지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요즘 조선일보가 한창 비판에 열을 올리는) 결혼산업의 논리에 자신의 낭만을 복무시키는 데 아무 주저함이 없는 젊은 연인들은 정작 결혼식날이면 이미 누더기가 된 마음 상태로 결혼식장에 들어선다. 끔찍한 통과의례쯤으로 여기고 애써 위안해 보지만 기다리고 있는 건 낭만적 사랑의 무한한 연장이 아니다. 울리히 벡과 엘리자베트 벡-게르샤임의 책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은 자본주의 재생산을 위한 1차 동원단위로써 ‘가족’이 어떻게 단혼제의 낭만적 결혼을 통해 양식화되었는지, 그럼에도 낭만적 결혼이 왜 자본주의의 노동, 출산/육아 등과 갈등관계에 놓이며, 그 갈등이 부부관계를 얼마나 심각하게 위협하는지를 성찰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 책은 결혼생활이 곧 전쟁의 연속임을 은유한다.

본디 낭만적 결혼관은 임금노동을 하는 남편과 가사노동을 하는 아내의 성별 분업을 전제로 하지만, 이 자체가 양성평등을 담보하지 못할 뿐더러, 이후 자본이 여성을 노동시장으로 불러냄으로써 여성에게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의 이중부담을 지우는 쪽으로 구조화된다. 그래서 결혼 관계에서 늘 손해를 보는 건 여성이다. 한국사회의 ‘아줌마’라는 집단 정체성도 이런 구조와 닿아 있다. 그러나 아줌마의 정체성은 이런 근대의 보편적 구조만으로 완성되지는 않는다. 가부장제라는 질료와 결합해야 한다. 한국사회의 ‘아줌마’는 양성 불평등이 구조화된 근대적 모순과 사적 공간에서의 봉건적 인습이 결합해 탄생한 ‘제3의 성’이다. ‘기혼여성’은 자신의 섹슈얼리티가 보존된 존재이지만 ‘아줌마’에게는 그것이 박탈돼 있다. 그들은 가족주의의 성채를 지키기 위해 궂은일을 도맡으면서도 집 안팎에서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다.

아줌마들은 희생과 헌신을 요구받고 능동적으로 수행하면서도 직접적인 권력을 쥐지 못한다. 오로지 남편과 자식(특히 남편의 분신인 아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권력을 쥘 뿐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가족 내의 관계는 ‘소유’의 문제로 환원된다. 살인적인 사교육 열풍도, 가부장을 사이에 놓고 벌어지는 고부간의 살벌한 갈등도 성별 분업에서 주체성을 박탈당한 아줌마들의 인정투쟁이다. 남편의 성매수는 눈감아줘도 신규 관계 앞에서는 머리끄댕이를 붙잡는(바람을 피우려거든 차라리 돈으로 여자를 사라는) 분열적 태도를 취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들은 사랑의 이름으로 결혼했으면서도 그 사랑을 오롯이 소유의 가치로 전치하고, 현실 속의 사랑은 사치이자 위험하기까지 한 것으로 치부하며, 거기서 오는 상실감을 대중문화의 판타지로 겨우 메우는 폐쇄회로 속의 거주자다.

설-송의 관계를 향한 아줌마들의 태도는 양성 불평등의 구조와 가부장제의 인습라는 열성인자 결합에 의해 고통받은 직·간접 피해 당사자가 드러내는 집단적 반응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잃고 마지막 남은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저항이다. 그러나 그 저항은 내면화된 지배이데올로기에 ‘순응하는 저항’이라는 모순에 갇혀 있다. 그 집단적 분노는 모순을 돌파할 수 있는 출구가 존재하지 않는, 모순의 자기 지시적 분노와 저항이다. 연예인의 연애 얘기가 왕성하게 소비되는 물신화된 사랑 이데올로기 세상의 음울한 역설적 풍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랑이 불평등과 억압의 구조를 은폐한다고 해서, 사랑 자체를 죄로 환유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닐까. 미워하는 게 죄지 사랑하는 게 죄는 아니지 않은가. 그들 둘의 사랑도, 또 선택도 어쩔 수 없는 것은 아닌지….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