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기민들의 눈에 허연 쌀밥 광주리를 머리에 인 것처럼 비쳐 이름 붙었다는 이팝나무의 꽃이 제 차례를 맞고, 물기 어린 그들 눈에 더 큰 배고픔의 기억으로 어룽댈 찔레꽃은 아직 가지와 이파리 속에서 만개(滿開)의 꿈으로만 차오르는 꼭 이맘 때, 난 그대와 자전거에 몸을 싣고 달린 적이 있다. 몇 해 전이었다. 햇살은 바투 붙은 쉼표 행렬 같은 자전거 바퀴살과 하얀 치아에 분홍빛 잇몸까지 드러낸 그대의 웃음에 튕겨 자잘히 부서지고, 만조를 만난 한강 아랫자락은 효모가 든 밀가루 반죽처럼 아득히 부풀어 비릿한 갯내가 내륙의 물가까지 가득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그 해 봄은 자글자글한 행복으로 충만했다. 그 위로 싸구려 자전거 두 대가 느린 시간의 길 위를 나란히 저어가고 있었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서 자전거는 ‘운송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몸과 자연의 길을 매개하는 ‘존재’다. 길은 자전거를 거쳐 몸속으로 흘러들어오고, 몸은 자전거를 거쳐 길로 흘러나간다고 했다. 여기서 자전거는 사람의 몸이나 사람이 가야 할 길과 동격이다. 그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과 길은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결되는데, 몸과 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다.’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며 이 탈것이 권정생 선생의 <강아지 똥>에서 강아지 똥과 민들레 사이의 흙과 같다고 느꼈다. 여기에는 생명의 순환 현상이 있다. 자동차는 다르다. 사람과 길을 매개하지 않고 다만 사람이 시키는 대로, 또는 사람을 부추겨 길을 정벌할 뿐이어서, 서로에게 아무런 축복도 돌려주지 않는다.

▲ 한겨레 5월11일치 1면 기사

자전거가 요새만큼 미디어의 각광을 받던 때가 일찍이 있었던가 싶다. 포털을 검색해보면 1시간 사이에 자전거 관련 기사가 십수 개씩 올라온다. 이쯤 되면 ‘자전거’는 ‘박연차 리스트’에 버금가는 이슈다. 레저 기사는 흘러간 레퍼토리다. 정치·경제·사회 할 것 없이 모든 영역에서 갖가지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자전거 생산업체들의 주가가 상종가를 친다더니, 이젠 뜬금없이 모터 생산업체들의 주가도 폭등세라고 전한다. 정부의 하이브리드 자전거 정책이 본격화하면 자전거에 모터를 달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덧붙는다. 이젠 경찰 방범 활동도 자전거로 하겠다고 한단다. 경기도는 민통선에 자전거 코스를 만들어 일반인에게 개방하겠다고 나섰으니, 앞으론 자전거가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에 대한 해설기사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미디어에 등장하는 자전거에는 자전거의 본성이 없다. 자동차의 아류, 아니 무한궤도 대신 두 바퀴를 단 불도저가 있을 뿐이다. 별안간 자전거 열풍이 불어닥친 사정이 너무 잘 알려져 있기에, 자전거의 본성을 거세한 채 벌어지는 자전거 관련 사업의 무한경쟁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인과관계로 비친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자전거에게는 폭포같은 축복이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강과 낙동강, 영산강에서 출발한 자전거가 강가를 따라 고속도로처럼 곧게 뻗은 자전거 길을 달려 한 데 만나는 꿈은 아날로그적일지언정 결코 순결하지 않다. 한반도 대운하의 공간 기획에 잘못 끼어든 자전거는 새벽 가락시장에서 대통령 손을 붙들고 눈물을 쏟은 어느 할머니의 처지만큼이나 처연하다.

한겨레가 이명박 정부의 자전거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11일자 1면과 3면에 이어 사설까지 동원해 정부 정책을 전형적인 전시행정이라고 꼬집었다. 자전거 이용을 활성화하려면 정작 필요한 건 도심 자전거도로인데 엉뚱하게 전국 일주망을 까는 데 치중하고 있다는 이 신문의 지적은 비판을 업으로 삼는 언론에겐 가장 기본적인 실천행위다. 이런 보도가 이제야, 그것도 매체 한 곳에서만 겨우 나온 것이 오히려 놀랍고 수상하다. 전국을 반나절 생활권으로 만들겠다며 KTX까지 놓고, 온전한 환경영향평가를 실시하자는 지율 스님에게 공무방해죄까지 씌운 이 사회가 ‘속도’에 대한 태도를 전면 수정한 게 아니라면 몇날 며칠 자전거로 광역을 횡단한다는 발상은 오로지 한반도 대운하의 상징조작을 위한 토건적 상상일 뿐이다. 그러니 정작 좁은 도심에서는 버스, 전철을 타고 오가게 하거나 질주하는 자동차 틈바구니를 목숨 걸고 헤쳐 나가게 하는 교통정책으로 내놓을 수밖에는 없는 일이다.

녹색과 성장의 관계는 붕어와 붕어빵의 관계보다 멀다. 이명박 정부의 자전거는 생명의 순환과 동떨어져 있다. 그나마 이 정부가 자전거로 포장하려는 녹색은 민망하기 이를 데 없는 변색이어서, 거꾸로 붙인 응원용 태극기를 바라볼 때마냥 얼굴을 붉히게 한다. 지금 지율 스님은 이명박 정부가 자전거 길을 닦겠다는 낙동강 거친 물가를 따라 고행의 자전거 순례를 하고 있고, 이 땅의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오체투지 순례단은 100일 가까이 전국을 돌아 한반도의 모든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수도권에 이르렀다. 그들이 낡은 자전거의 페달을 힘겹게 굴리거나 온몸을 길바닥에 쓸려가며 고통스럽게 기어온 이유는 단 하나로 모아진다. 이명박 정부가 자전거를 매명해 4대강 물길을 파헤치고 녹색의 이름으로 생명을 파괴하려는 물신주의를 내려놓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원이다.

신문·방송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싶어하는 거나, 내 자전거의 추억이 불도저의 무한궤도에 깔리지 않고 온전하기를 바라는 건 춘궁기에 배부른 욕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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