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변’이라고 해야 할까. ‘영남당’으로 불리던 집권 여당의 대표에 호남 출신이자 박근혜 대통령의 ‘복심’인 이정현 의원이 당선된 것을 보는 여론의 시선은 복잡하다. 그러나 어쨌든 이정현 대표의 등장이 박근혜 대통령의 ‘마이 웨이’를 강화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로 생각된다.

10일 주요 일간지들은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의 탄생에 대해 ‘호남 출신’이면서 ‘친박’이라는 점을 중점적으로 평가했다. 보수언론은 주로 보수정당 사상 첫 호남 대표가 탄생했다는 데에 의미를 두는 헤드라인을 선보였다. 한겨레, 경향신문, 한국일보 등의 신문은 ‘친박’, ‘도로 친박당’ 등의 어휘를 통해 새누리당 전당대회 결과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도로 친박당’이라는 규정은 지도부를 친박계가 거의 싹쓸이하다시피 하면서 피할 수 없게 된 걸로 보인다. 대표야 그렇다 쳐도 최고위원회 구성을 보면 조원진, 이장우, 최연혜, 유창수 최고위원 등이 모두 친박계로 분류되고 비박계는 강석호 최고위원 한 사람 뿐이다. 비박계 입장에서는 4·13 총선 대패와 이후 지도부 구성 과정에서 친박계가 무리수를 둬가며 패권을 휘두른 것에 대한 명확한 비판여론이 존재함에도 판을 뒤집지 못한 게 상당한 타격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게 됐다.

주호영, 정병국 의원의 단일화를 이끌어냈다고 제각기 주장한 김무성 전 대표와 오세훈 전 서울시장도 당분간은 관망으로 태세를 전환하는 게 불가피하다. 특히 친박계의 선전에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전당대회에 참여해 대의원들과 대면하고 연설을 한 효과가 작용했다는 점까지 같이 보면 차기 대권주자로서 김무성 전 대표와 오세훈 전 시장의 이후 행보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거라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 당내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거슬러서는 대권을 움켜쥐기 어렵다는 사실이 이번에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정현 새누리당 신임 당 대표가 10일 오전 서울 동작구 현충원에서 참배를 마치고 나오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수차례 지적됐지만 ‘이정현 체제’는 친박계의 일방적인 당 운영과 편파적 대선관리로 이어질 것이다. 전당대회 전 친박계와 비박계는 ‘단일지도체제’로의 개편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이정현 대표는 이전의 김무성 전 대표보다도 훨씬 더 강한 권한을 갖게 됐다. 권한이 별로 없을 때에도 전국위를 파행으로 이끄는 등 실력행사를 공공연히 했던 친박계가 완전히 권한이 독점한 상태에서 누굴 봐주고 하지 않을 거라는 건 삼척동자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언론들은 이정현 신임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참모 중 한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우려를 표하면서도, 그가 2014년 당시 경질되다시피 청와대를 떠났고 대표 경선 과정에서 당을 혁명적으로 바꾸겠다고 공언했다는 데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보고 있다. 그러나 그간 이정현 대표가 해온 일을 보면 당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일이 과연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KBS 보도개입 문제와 같은 사안이 그렇다. 이정현 대표는 이 문제에 대해 이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있다. 언급해봐야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 탓인지 보수언론들도 이 문제를 재론하지 않는다. 보수언론의 10일 지면에서 KBS 보도개입 의혹은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았다.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보도에 대해 이제는 당 대표 직함을 갖고 방송사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해 윽박지를 것인지 의문이다. 이 문제를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권력으로부터의 부당한 보도개입은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다수 언론들은 그러한 문제제기는 이미 포기한 듯 보인다.

더군다나 이정현 대표는 기존의 새누리당 핵심 지지층의 입장에서 볼 때 ‘약점’이 많은 후보이다. 민정당 당직자라는 ‘머슴’ 이력에, 영남이 아닌 호남 출신이고, 선수도 대표급으로 보기에는 다소 중량감이 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전적인 권한이 보장된다 하더라도 새누리당의 권력 구조 상 이정현 대표가 자기 비전을 갖고 독자적인 정치적 플레이를 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언론이 덕담처럼 건네는 새누리당의 ‘의미 있는 변화’는 오로지 친박계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가능할 전망이다.

결국 ‘이정현 체제’의 최대 목표는 박근혜 대통령이 원하는 그림으로 정권재창출에 기여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반기문 대망론’에 다시 불이 붙는 그림을 전망하는 이유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비박계 대권주자들이 이번에 정치적 손해를 입은 상황에서 반기문 UN사무총장이 돌아올 때까지 남은 반년 간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내는 건 쉽지 않다. ‘배신의 정치’로 철퇴를 맞은 유승민 의원 역시 대권주자로서 의미 있는 행보를 모색하기는 어렵게 됐다. 이런 판국에 이정현 대표의 호남, 반기문 사무총장의 충청, 박근혜 대통령의 대구경북이라는 삼각연합까지 언급되고 있으니 이후의 과정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안 봐도 비디오’다.

9일 새누리당 전당대회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 (연합뉴스)

그렇기 때문에 일각에서 ‘분당’의 우려까지 제기되는 실정이다. 물론 실제로 새누리당이 분리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쉽지 않다. 여당 일부 관계자들은 친박계야 천막당사나 친박연대로 표현되는 나름의 풍찬노숙을 감행한 바 있지만 비박계는 이른바 ‘웰빙’ 정치를 해왔기 때문에 조직 분리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다. 외곽에서 정의화 전 국회의장이나 이재오 전 의원 같은 사람들이 신당 창당 등을 주장하고 또 모색하고 있으나, 기성정치 내 제3세력도 감당이 안 되는 마당에 제4, 제5세력의 등장은 실패 확률이 높다는 점에서 동력의 확보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조직 분리의 전제가 ‘개헌’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래서다. 적어도 조직을 나누더라도 정치연합을 통한 연립정부 구성이 가능해야 분당의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논의 수준으로 볼 때 대선 전에 개헌이 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국회 차원에서 헌법 초안을 만드는 작업까지는 어찌어찌 밀어 붙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까지 국민적 공감대가 없는 상황에서는 국민투표를 시작할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하다.

결국 ‘이정현 체제’는 불만에 찬 비박계를 힘으로 제압하면서 현 상태를 끌고 가는 모양새가 될 수밖에 없다. 벌써 이정현 대표는 언론을 통해 “여당은 청와대와 부딪쳐서는 안 되고 여당이면서 야당 흉내내는 것은 짝퉁”이라고 말하고 있다. 수직적 당청관계의 유지와 이념적 중도화를 모두 경계하는 발언으로 ‘배신의 정치’를 언급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현실인식과 일치한다. 이정현 체제의 첫 시험대는 개각과 맞물린 국회 현안 문제와 우병우 민정수석 거취에 대한 입장표명이 될 것인데, 결국 청와대에 뭔가 할 말을 하는 것처럼 하는 ‘시늉’에 그치고 말 것이라는 게 유력한 전망이다.

야권 일각에서는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의 등장을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도 있다. 만일 비박계 대표가 탄생해 중도화된 대권주자들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면 야당들로서는 이후 행보를 하기가 까다롭게 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정현 대표 체제의 앞날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전략을 세우기 쉬운 부분도 있다. 그러나 2012년 대선에서 봤듯 상대가 분명할지라도 결국 51대 49의 승부를 벌일 수밖에 없고, 야당이 자칫 잘못하면 패배하는 건 순식간이다. 여당의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당위의 명분을 말하는 정치를 만들고 충실한 콘텐츠를 채워가도록 노력하는 게 우선이다. 그러나 이런 원론과는 별개로 이정현 대표 체제가 야당의 오만을 불러올까 우려가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정권이 교체되길 바라는 다수 야권 지지자들의 생각도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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