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더’가 또 문제다. 새누리당 당 대표 경선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라는 메시지가 조직적으로 돌고 있다는 것이다. 비박계의 경우는 단일후보로 나선 주호영 의원이 그 대상이다. 이건 정해진 수순이기 때문에 놀랄 일이 아니다. 친박계의 경우는 그간 애매했는데, 이정현 의원 지지로 입장을 정리한 것 아니냐는 게 언론의 전망이다. 8일 신문 지상의 분석을 보면 그렇다. 그러나 이정현 의원이 과연 이런 시기에 새누리당 대표가 되는 게 한국 정치의 발전이라는 기준에 비춰 바람직한 일인지 의문이다.

동아일보 8일자 사설

8일 동아일보는 <‘오더 투표’ 與 대표 경선, 계파청산 싹수 노랗다>는 제목의 사설에서 비박계와 친박계 내에서 각기 주호영 의원과 이정현 의원을 지지하자는 목소리가 나온다면서 “이번 대표 경선마저 계파 투쟁으로 끝나면 ‘계파 대표’가 관리할 내년 대선후보 경선 또한 계파주의로 치달아 국민의 지지에서 멀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아일보는 친박계 후보 중 하나로 분류되는 이주영 의원이 이런 상황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보인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당 주류이자 다수인 친박이 표를 결집해 사실상 단일화를 한다면 전당대회는 하나 마나”라고 지적했다.

한겨레 8일자 5면 기사

결국 이런 관점대로라면 이정현 의원이 당 대표가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셈이다. 친박계가 이정현 의원을 지지하기로 한 것에는 여러 정치적 이유가 있는 걸로 보인다. 한겨레는 이날 <친박의 노골적 ‘이정현 밀기’…전대 직전 ‘오더투표’ 논란>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이 후보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고,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충성도를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따라 지지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한다. 여기에 보수정당 최초의 호남 출신 새누리당 대표라는 ‘스토리’가 덧씌워지면 ‘도로친박당’이라는 계파 패권주의 색채를 가릴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썼다.

한국일보 8일자 8면 기사

한국일보는 같은 날 <주호영 당선 땐 김무성 웃고 이정현 이기면 ‘潘 대망론’ 탄력>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친박계 핵심 이정현 후보가 새 당 대표가 될 경우 호남-충청-대구·경북(TK)을 잇는 삼각연합을 앞세운 친박계가 ‘반기문 대망론’ 점화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며 “박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이 몰려 있는 충청-TK 연합만으로는 반기문 대망론의 위력이 제한적일 것이라는 한계를 호남 출신의 이 후보가 메워줄 수 있다”고 썼다.

이런 보도 내용으로 보면 친박계가 나름의 ‘마스터플랜’을 갖고 이정현 의원 지지를 모색하고 있다는 정황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정현 의원이 대표가 될 경우 과연 한국 정치의 발전과 정권재창출에 도움이 될 것인지는 의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수직적 당청관계를 당연시하고 내부의 이견을 허용하지 않아왔다. 청와대의 이런 태도가 오히려 국정운영을 어렵게 하고 4·13 총선의 패배를 불러왔음은 더 말할 것이 없다. 어떤 ‘도’를 기준으로 봐서도 이런 식의 정치는 바람직하다고 보기 어렵다. 때문에 한국 정치의 발전을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이런 정치는 청산돼야 한다. 그런데 이정현 의원은 위의 보도 등에서 보다시피 가장 강한 충성심을 자랑하는 ‘친박 중의 친박’이다. 그가 당 대표가 될 경우 박근혜 정권 특유의 상명하달식 정치가 바뀌리라고 보기 어렵다.

그를 한동안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세월호 참사 당시 KBS 보도 개입 논란을 보면 이런 의혹을 확실히 가질 수 있다. 청와대 홍보수석이 KBS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해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린 보도에 문제를 제기하고 압력을 가했다. 오죽하면 KBS 내에서도 보수적이라고 소문난 당시 보도국장이 버티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겠는가. 이정현 의원은 이에 대해 한 번도 잘못을 인정한 일이 없다. 때문에 당 대표 경선 과정에서 계파 청산이나 단결을 외쳤다 하더라도 그의 이런 ‘충성’은 앞으로도 계속될 거라는 짐작을 거두기가 어렵다.

현실적 문제도 있다. 이정현 의원은 당 내 기반이 크지 않다. 앞서 한겨레 기사에는 “친박계 내부에서는 오랜 기간 실무 당직자를 지낸데다 선수(3선)도 당 대표감으로는 낮은 이 후보에 대해 ‘어떻게 당대표로 모시느냐’는 정서가 적지 않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새누리당이 실질적으로 ‘영남당’에 가깝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그가 호남 출신이라는 것에 대한 지역적 차별정서가 존재할 것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런 불리한 조건에서는 ‘정치적 모험’을 감행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이정현 의원은 청와대와 친박계의 ‘꼭두각시’ 그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다.

친박계가 ‘반기문 대망론’에 대한 미련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반기문 UN사무총장도 자격을 갖추었다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있다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꿔나갈 어떤 비전을 갖추고 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인사를 벌써부터 ‘대망론’이니 하며 띄우는 건 자신들이 갖고 있는 권력의 효용을 연장하려는 것 외의 어떤 공적 의도도 찾아볼 수 없는 행위다.

새누리당 당 대표 이정현 후보가 5일 오후 충남 천안시 유관순체육관에서 열린 새누리당 대표·최고위원 선출 충청권 합동연설회에서 정견발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들은 벌써 8년째 이어지고 있는 보수정권의 ‘기만적 통치술’에 절망하고 있다. 애매모호한 가치를 내세우며 표를 얻어놓고 몇 가지 보잘 것 없는 정치적 술수로 이 약속을 가치 없는 걸로 만드는 일을 반복하는 통에 정치적 냉소주의는 확대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대선은 2012년의 박근혜 후보처럼 애매한 정치적 아우라를 내세우는 정치인이 아니라 확실한 콘텐츠로 승부를 볼 수 있는 인물이 대권에 근접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앞서의 분석 등을 참고하면 이정현 대표의 탄생은 박근혜 대통령이 선호하는 기만적 통치술의 생명 연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이정현 의원이 대표가 되는 건 새누리당 입장에서도 ‘정권재창출’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이행하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

그러나 보수언론의 논조를 보면 ‘주호영보다는 차라리 이정현’이라는 정서가 팽배해있음이 느껴진다. 다시 동아일보의 지면을 뒤적여보면 이런 기류가 명백하다. 이날 동아일보 김순덕 논설실장은 <‘내시 여당’의 반란, 누가 할 수 있을까>란 제목의 칼럼에서 주호영 의원과 정병국 의원이 단일화를 한 걸 ‘비박 패권주의’로 표현하면서 대구경북 지역의 사드 배치를 반대했다는 전력이 있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동아일보는 이 글에서 “비박 단일 후보가 주호영이어서 당 대표로 뽑힌다면 이번엔 웰빙끼리 돌아가며 해먹자는 의미밖에 안 된다”며 “차라리 ‘나를 대통령의 내시라고 불러도 부인하지 않겠다’며 ‘새누리당을 혁명해서 뒤바꿔 보겠다’는 친박 이정현이 당 대표 되는 게 새누리당에는 나을 것 같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 8일자 칼럼

주호영 의원이 당 개혁에 대한 별다른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런 주장도 의미는 있다. 그러나 어쨌든 다시 문제의 핵심으로 관점을 옮겨보면, 이런 시각은 대통령의 성이 ‘박’씨고 친‘박’계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현실을 애써 외면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번 전당대회 결과로 새누리당 내의 친박 색이 퇴조하면 할수록 김무성 유승민 의원, 남경필 경기도지사,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의 이후 대권행보가 받을 탄력은 강해질 것이다. ‘장’은 물건을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모두 바글바글한 게 좋은 것이다. 이 점을 외면하면 정치세력으로써 파산을 하는 결말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걸 알면서도 스스로 파산을 선택하겠다는 것이라면 말릴 이유도, 안타까워 할 이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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