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가 3일 그간 논란이 돼왔던 평생교육 단과대 사업 참여를 결국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학생들의 본관 점거 시위가 일주일 이상 이어질 판국인데다 교수 사회 일부가 반대 여론에 힘을 실은 게 결정적이었다는 평가다.

언론이 이 사태를 다루는 시각은 상당히 복잡하다. 정부 정책이 졸속으로 추진된 탓이 크고, 그러다 보니 학내에서의 민주적 절차 역시 제대로 담보될 수 없었다. 학생들의 시위는 기성의 학생운동과 분리된 방식으로 진행됐고, ‘이대 학벌주의’니 소비자운동의 한계니 하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상황 자체에 복잡한 원인이 있는 것은 분명하고 여기에 저널리즘적 성찰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이 문제를 다루는 보수언론의 방식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동아일보 4일자 지면 칼럼

‘이대’라고 하면 사람들이 쉽게 떠올리는 전형적 캐릭터상이 있는 게 사실이다. 동아일보는 영화 <타짜>의 ‘정마담’을 연상한 모양이다. 횡설수설 코너의 <‘이대 나온 여자들’의 승리>라는 제목의 글에서 최영훈 수석논설위원은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이 영화의 명대사(?)를 인용하고 있다. <타짜>의 정마담은 과연 세간의 ‘이대 나온 여자’에 대한 부당한 고정관념을 재현하고 있는 듯 보인다. 정마담은 겉으로는 도도한 척 하지만 속칭 ‘하우스’를 운영하며 ‘호구’를 등쳐먹는 속물성을 가진 인물이다. 이대생이란 ‘이대’라는 간판으로 좋은 집안에 시집을 가 남자가 벌어다 준 돈으로 잘 먹고 잘 살며 제 살 길이나 찾는 여자들이라는 게 도박판의 인물로 표현된 게 아닌가? 사실 이건 엘리트 여성을 아니꼽게 바라보는 남성들의 전형적인 ‘정신승리’적 관념이 여러 버전으로 재생산된 결과다.

그저 언급한 캐릭터 하나에 과민반응 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이 ‘횡설수설’의 서두가 심상찮아 보이는 건 뒤쪽에 등장하는 논리 때문이다. 이 글에서 동아일보는 “미래 사회에서 도입이 절실한 수준 높은 평생교육시스템을 ‘학벌주의’로 배척하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따가운 눈초리도 엄존한다”고 썼다. 물론 이외의 다른 비판을 열거하며 소개한 논리이긴 하지만, <‘이대 나온 여자들’의 승리>라는 제목에 맨 앞쪽의 ‘정마담’에 대한 설명이 이 대목과 ‘대구’를 이룬다는 느낌을 지우기는 어렵다.

중앙일보 4일자 지면 칼럼

이대생들의 본관 점거 시위를 ‘학벌주의’의 문제로 보는 건 중앙일보도 마찬가지다. 물론 동아일보의 ‘횡설수설’이 보여주는 괴이한 감성보다는 훨씬 세련된 논리가 등장한다. 이날 중앙일보 지면에 실린 <조직되지 않은 조직>이란 글에는 2011년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나 브렉시트 투표, 4·13 총선 등에서 모두 ‘조직되지 않은 조직’이 위력을 발휘했다면서 이대생들의 시위가 이들과 같은 양태를 갖고 있다고 진단했다. 중앙일보는 “조직의 근저에 이념이 있다면 조직되지 않은 조직의 근저에는 이익이 있다. 속물이라는 게 아니다. 행동에 나설 만큼 절박하고 현실적인 이유가 존재한다는 의미”라면서 “점령 시위는 일자리가 촉발했다. 이대 사태의 확산은 ‘이대 출신’이란 개인 정체성의 위기에 힘입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썼다. 여기서 ‘점령(occupy) 시위’란 월스트리트 시위를 말하는 걸로 보인다. 결국 이대 사태에 대해선 ‘학벌주의’라는 기준을 들이댄 거다.

물론 중앙일보 글의 결론이 조직되지 않은 조직의 형성이 갈수록 빈번해지는 것을 걱정하면서 “우리 사회는 그들이 보내는 신호를 자꾸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게 걱정이고 두렵다”고 하는 건 동아일보에 비해선 확실히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게 정말 걱정이고 두렵다면 이대 사태를 야기한 문제의 원인 자체에 대한 관심을 환기해야지 단지 학벌주의니 이기주의니 하며 ‘이대생’에 대한 성차별적 고정관념의 재확인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보수언론 역시 이런 문제를 알기 때문인지 정책에 대한 문제제기를 함께 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중앙일보는 이날 <소통 부재가 빚은 이대 사태 되풀이돼선 안 된다>는 제목의 사설에서 “정부 정책의 맹점이 그대로 드러났다”면서 “교육부가 대학 구조개혁을 명분으로 연간 2조원이 넘는 재정지원을 미끼로 대학을 뒤흔들다 역풍을 맞은 것”이라고 썼다. 또, 중앙일보는 평생교육 단과대 지원 사업에 대해 “1년간 10곳에 30억원씩 대주는 것으로 취지는 좋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선취업 후진학 제도 활성화’ 발언 직후 급조된 게 문제다”라며 “당장 단과대를 신설해 내년 3월 개강해야 하는 일정인데도 지난달 이화여대 등 4곳을 추가 선정해 밀어붙였다. 대통령 임기 내 ‘완수’ 구설이 퍼진 연유다”라고도 썼다.

조선일보 4일자 칼럼

마찬가지의 지적은 조선일보에서도 나온다. 조선일보는 이날 지면에 안석배 사회정책부 차장이 쓴 <교육부 졸속이 빚은 梨大 사태>란 제목의 글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고교 졸업 후 취업해서 자기 능력을 발휘하는 풍토를 만들어 가자는 취지로 ‘선취업 후진학’ 정책을 언급해 추진했으나, 이는 장기적으로 사회적 인식과 문화를 바뀌어야 가능한 것이라면서 예산을 미끼로 단기적 성과를 만들려 했던 게 잘못이라고 썼다. 조선일보는 평생교육 단과대 지원 정책이 다음 정부에서 유지될 것인지, 또 이 제도를 노린 사설입시학원이 생기고 일부 부실 대학이 제도를 악용해 정원 늘리기에 활용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면서 교육부의 모순된 정책이 혼란을 키우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조선일보의 지적은 이날 보수언론 지면에 실린 비판 중 가장 성의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렇더라도 근본적 문제를 전부 짚지는 못한 것 같다. 통치라는 차원에서의 교육정책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한국의 교육정책은 사실상 경제정책에 종속돼있다. 인구변화 및 산업구조의 고도화에 따른 ‘인적자원’을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압축성장은 산업구조의 급속한 변화를 촉발했고, 이에 필수적인 숙련노동의 재생산은 대학에 떠맡겼다. 그러니 한편으로 대학을 구조조정 한다면서 다른 한편으로 재정지원을 통한 우회적인 정원 확대를 유도하는 이중적 정책추진이 명분을 얻게 된다.

평생교육 단과대 지원 사업의 발단이 된 박근혜 대통령의 ‘능력 중심 사회’는 일견 학벌주의에 대한 대안 제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학벌이 더 이상 제대로 된 경쟁의 표지가 되지 못한다는 기득권의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능력 중심 사회’가 학벌을 제외한 또 다른 ‘스펙경쟁’들과 결합하면 오히려 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총량은 증가하는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는 ‘능력 중심 사회’를 연상시키는 ‘능력 기반 채용’, 그러니까 국가직무능력표준(NCS)을 통한 채용 역시 추진하고 있는데 이 역시도 겉보기에는 부당한 ‘학벌주의’가 아닌 그야말로 능력에 따른 채용절차를 새로 도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게 직무평가에 따른 성과급제를 정당화하고 임금피크제나 ‘중규직화’와 결합하면 노동조합 무력화를 위한 일련의 정책에 마침표가 찍는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그간 보수언론들은 정부의 이런 정책 흐름에 찬성하며 지지의사를 밝혀왔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몇 가지 교육정책들도 실은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 일관된 철학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보수언론이 공론조성의 상당한 책임을 지고 있다고 본다면, 이번 사태에 대해 이들이 해야 할 말은 그간의 논조에 대한 해명이나 반성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올바른 비판은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게 저널리즘적 윤리의 문제라는 걸 간과할 수는 없다. 무한경쟁의 논리를 강화하기 위해 학벌주의에 동조하다가, 또다시 ‘진정한 무한경쟁’의 가치를 살리기 위해 학벌주의를 비난하는 일을 반복하는 것으로는 ‘조직되지 않은 조직’을 키우고 냉소만을 강화할 뿐이다.

여기서 다시 ‘정마담’의 대사를 떠올린다. 정마담은 착한 척 하며 ‘호구’를 등쳐먹다 살아남기 급급한 위기의 상황이 되자 자기를 굳이 걱정하는 ‘호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 이 마당에 착한 척 하세요? 여긴 지금 지옥이야. 각자 알아서 살아남자고.” 이대생 뿐 만이 아니라 수많은 젊은이들의 현실 인식이 이와 같을 것이다. 학벌주의니 이기주의니를 언급하기 전에, 그것 외에는 선택할 수 없게 만든 공론의 책임을 상기하는 게 먼저가 아닌지 자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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