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오바마가 홈런을 쳤다”, 미국 언론들은 그렇게 보도하고 있다. 현지시각으로 25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지지연설을 한 것에 대한 표현이다. 미셸 오바마는 현직 대통령의 배우자, 즉 영부인으로서 직접 나서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지지의사를 밝혔다. 그는 ‘내 친구’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대통령이 될 유일한 인물”이라는 등 찬사를 보내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흑인들의 중노동으로 만들어진 백악관에서, 우리 아이들은 여성이 대통령이 되는 게 자연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해 흑인 대통령에 이은 여성 대통령 탄생의 의미를 강조하기도 했다.

오바마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이 200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서로 겨룰 때만 해도 이들은 ‘정적’의 관계였다. 오바마 대통령 당선 이후 힐러리 클린턴은 오바마 행정부의 요직을 맡아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오바마 대통령은 다시 힐러리 클린턴에 대권의 기회를 열어 줌으로써 양자 간의 신뢰관계를 지켜냈다. 미셸 오바마의 이날 연설이 큰 울림을 가질 수 있었던 데에는 내용 자체가 감동적인 것도 있었지만 그간의 과정에 이런 ‘스토리’가 있었던 탓도 작용했을 거다.

힐러리 클린턴을 후보로 확정하는 전당대회를 감동의 도가니로 만드는 데에는 또 다른 ‘정적’의 역할이 주효했다. 경선에서 그야말로 사정없는 비판을 주고받았던 버니 샌더스가 그 주인공이다. 이날 버니 샌더스는 열광적인 지지자들이 여전히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상황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수단을 동원해 힐러리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여전히 힐러리 클린턴을 적대하는 지지자들에게 따로 자중하라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민주당 전국위원회(DNC)가 경선을 편파적으로 관리한 정황이 폭로돈 상황이었기 때문에 버니 샌더스의 ‘경선 승복’은 더 의미 있는 것으로 비춰진다.

27일 조선일보 1면 톱기사

27일 조선일보가 민주당 전당대회의 이러한 풍경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인상 깊다. 조선일보는 이날 1면 톱에 버니 샌더스의 지지 연설에 대한 기사를 배치하고 감동에 눈시울을 붉힌 빌 클린턴의 사진을 함께 실었다. <“승복이 민주주의”…政敵 울린 샌더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볼 수 있듯 이날 조선일보가 주목한 것은 전당대회를 통해 경쟁의 결과에 승복하고 하나로 단결하는 미국 정치의 풍경이다. 조선일보는 3면에도 <미셸, 한때 적이었던 힐러리 치켜세우며 “I’m with her”>란 제목의 기사를 배치해 다시 한 번 이런 측면을 강조했다.

조선일보 27일자 3면

앞서도 언급했지만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의 풍경에서 그런 의미를 찾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특히 조선일보가 이런 측면을 강조하는 이유는 국내정치의 최근 상황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조선일보가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과 관련한 민감한 보도를 한지 일주일 이상이 지났지만 여전히 청와대는 무시로 일관하고 있다. 대통령은 청와대 관내에 머물고 있다면서도 ‘휴가’라는 핑계로 이 문제에 대한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 여당 내에서까지 ‘사퇴론’이 제기되지만 청와대는 사실상 권한을 보장받을 수 없는 특별감찰관 조사 외의 어떤 대응책도 내놓은 바 없다.

TV조선은 25일 청와대 안종범 정책기획수석이 16개 재벌기업들이 거의 500억 원에 달하는 모금을 하는데 개입했다는 의혹을 단독 보도했다. 안종범 수석이 전경련을 앞세워 기업들이 압력을 가해 ‘문화재단 미르’를 설립하도록 했다는 거다. TV조선이 정권 핵심에 부담이 되는 보도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윤상현, 최경환 의원 그리고 현기환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4·13 총선에서 공천에 개입했다는 사실 역시 TV조선 보도를 통해 폭로됐다. 이 보도의 여파로 서청원 의원이 당 대표 불출마 의사를 밝혀 새누리당 전당대회 구도가 완전히 헝클어졌다는 점을 보면, 조선일보와 관계사들이 작정하고 나섰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이 ‘작정’이란 게 무엇인가. 조선일보가 보수언론이고, 한국적 언론환경에선 이들이 차기 대선에서 보수적 지향을 가진 후보의 당선을 바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위해 결국 새누리당 대선후보의 탄생 과정에 대한 어떤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상기하면 답은 하나 밖에 없다. 그동안 박근혜 정권이 적대한 인사들이 오히려 정권재창출을 주도해야 한다는 정무적 판단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조선일보의 이날 1면 메시지는 그런 차원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향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정권재창출이 아닌가. 정권재창출을 위해서는 대통령이 유승민과 화해하고 김용태 당 대표 탄생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비박에게 패배한 친박 당권 주자들도, 또는 친박에게 패한 비박 당권 주자들도 결과에 승복하고 단결해야 하지 않겠는가.

보수세력이 단지 권력을 잡기 위한 ‘흉계’의 차원이 아니라 스스로 혁신하고 변화해서 정권을 재창출하겠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긍정적인 일이다. 그러나 누구의 유불리를 논하기 전에 외국의 정치가 우리 정치에 시사하는 것에 대한 근본적 통찰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초당적 협력, 또는 단결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뿐 만이 아니다.

미국 사회는 사실상 ‘흑백내전’의 지경으로 돌입하고 있다. 경찰의 과잉대응으로 흑인이 총격을 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다시 흑인들이 경찰을 조준사격 하는 비극마저 일어났다. 이 사건의 희생자를 주모하는 추도식에는 오바마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함께 참석했다. 보수와 진보, 백인과 흑인을 대표하는 전현직 대통령이 함께 만나 ‘미국은 분열돼있지 않다’, ‘갈등은 극복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공표한 것이다. 물론 이는 부시 전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에 적대적인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퍼포먼스로 볼 수도 있으나, 최소한 정치에 명분과 품위가 왜 필요한지를 보여줬던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댈러스 피격 사망 경찰관 5명의 추모식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오른쪽)이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왼쪽)의 손을 잡고 있다. (연합뉴스)

브렉시트 문제로 총리직을 내려놨던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론이 마지막 의회 질의응답(PMQ)에 나서 했다는 발언도 정치의 품격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여성 총리 배출에 있어서는 적어도 2대 0”(여성의 지위 향상에 적극적인 노동당이 아니라 오히려 보수당에서 마가렛 대처와 테리사 메이를 배출했다는 뜻)이라면서 몇 가지 자학적인 유머를 섞은 후 “(이 자리에서의) 고함도, 야당의 가시 돋친 말도 그리울 것”, “(이 자리에서) 지도자를 거칠게 대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건 자랑스러운 거고 계속돼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가 이날의 PMQ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나도 한때는 미래였다”인데, 이는 과거 토니 블레어 전 총리에게 “당신도 한때 미래였다”며 비판의 날을 세웠던 걸 자기 자신에게 다시 되돌린 것으로 해석된다. 서로 열띤 비판을 제기하며 토론하는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스스로를 비판의 대상에서 빼놓지 않겠다는 자부심과 자신감을 보여준 발언이다.

반면 우리는 어떤가. 보수정권 내내 우리 국민들은 자부심과 자신감의 정치보다는 술수와 공작에 기반한 통치를 더 많이 경험했다. 명분과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정치인보다는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권력자의 모습에 더 익숙해졌다. 이런 모습은 정치에 중요한 것은 오로지 ‘힘’ 뿐이라는 냉소적 인식을 강화한다. 박근혜 정권에서 정치의 이러한 타락은 그야말로 극을 달리고 있다. 오죽하면 보수언론이 나설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람들은 여전히 품격 있는 정치를 갈망하고 있다는 점이 확인되고 있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의 연설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된 것은 중부담-중복지, 따뜻한 보수 등의 ‘아젠다’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치와 노선을 지키기 위해 뜻을 굽히지 않는 품위 있는 모습을 정말 오랜만에 본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니 지금은 휴가를 즐길 때가 아니다. 유승민 의원은 “보수가 바뀌면 대한민국이 바뀐다”고 주장한다. 대통령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직접 나서서 이제는 보수정치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의 박근혜 대통령과 보수정치 모두가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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