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대통령이 ‘정치’를 무엇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21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주재하면서 했다는 발언을 보면 답답함이 밀려온다. 정치인이 쉬운 말을 써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동의하는 편이지만, 문제의식 자체가 1차원적이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통치의 핵심에 서있는 대통령이라면 분명한 정치에 대한 분명한 철학과 비전을 가져야 한다는 건 상식적인 얘기다.

그러나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오직 너와 나, 아군과 적군 밖에 없는 것 같다. 대통령은 “저도 무수한 비난과 저항을 받고 있는데 지금 이 저항에서 대통령이 흔들리면 나라가 불안해진다”고 했다. 또, “여기 계신 여러분들도 소명의 시간까지 의로운 일에는 비난을 피해가지 마시고, 고난을 벗 삼아 당당히 소신을 지켜 가시기 바란다”고도 했다. 이게 사드 배치 문제로 갈등이 격화되고 핵심 참모가 여론의 사퇴 압력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할 말인지 의심스럽다.

그러니까, 대통령의 말은 정치권의 사드 배치에 대한 문제제기와 일부 언론이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의 사퇴를 요구하는 걸 ‘정권 흔들기’로 규정하겠다는 이야기다. ‘정권 흔들기’라는 말 속에는 ‘불순세력’이라는 말과 상통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비판의 내용을 가지고 사리를 따져보자는 게 아니라 문제를 제기한 사람의 ‘의도’만을 문제 삼는 것이기 때문이다. 토론을 통해 생산적인 결론을 내리고자 하는 사람은 상대의 태도가 아니라 논리를 따진다. 그저 상대방을 이겨먹고 말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논리는 접어두고 상대의 의도와 속내만을 셈하기 마련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21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북한의 탄도 미사일 발사 등 최근 북한의 도발 위협과 관련해 안보상황 점검을 위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통령이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유승민 의원을 사실상 ‘배신자’로 규정하고 쫓아내다시피 한 것도 결국 적과 아군의 논리를 들이댄 결로 볼 수 있다. 4·13 총선 직전까지 대통령은 정부 여당이 원하는 형태로 국회가 법안을 통과시켜주지 않는 것을 문제 삼으며 ‘발목을 잡지 말라’는 취지의 주장을 반복해서 제기했다. 보수언론과 이들이 지배하는 종편이 이에 적극 호응했다. 야권은 국회선진화법을 악용해 정부가 하려는 일에 사사건건 어깃장을 놓는 심술꾸러기처럼 묘사됐다. 종편만 보면 야당이 정부의 어느 정책을 무슨 이유로 어떻게 반대했는지 누구도 알 수 없다.

4·13 총선이 ‘여소야대’로 귀결된 건 대통령의 이런 1차원적 상황인식에 동의하는 국민이 그만큼 적었다는 걸 의미한다. 책임있는 정치인이라면 국민의 이런 상태를 반영할 수 있는 방향으로 노선을 전환해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변하지 않았다. 신문사 편집국장과 방송사 보도국장들을 불러다 놓고 소통을 하는 척을 잠시 해본 다음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박근혜 대통령은 “사드 배치 외에 북한의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우리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부디 제시해달라”고도 말했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이 말만 들으면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마치 아무런 대안도 없이 ‘반대’라는 구호만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상황을 이렇게 단순하게 보면 모든 일이 다 쉽겠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비판을 제기한 것은 문제가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드 배치로 미사일 요격능력을 강화하는 것만이 북핵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법이라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사드는 수도권 방어능력이 없으니 북한의 장사정포와 방사포 등을 막기 위해 센추리온이니 아이언돔이니 맨티스니 하는 무기를 잔뜩 들여오면 된다. 사드는 또 북한의 SLBM을 막지 못하니 핵잠수함을 건조해야 한다. 요격능력을 추가로 강화하기 위해서는 이지스함의 SM-3 탑재도 꼭 필요하다. 우리가 이런 방안을 추진하면 북한 역시 이를 피해갈 수 있는 또 다른 유형의 작전을 입안할 것이고, 우리도 그걸 방어하기 위한 수단을 또 다시 갖추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남들은 이런 걸 ‘군비경쟁’이라고 부른다. 여기엔 당연히 천문학적인 예산이 계속 소요될 수밖에 없다.

이것보다는 대화가 더 싸게 먹히고 안전하니 대북관계 개선을 해야 한다는 게 대북온건론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그간의 과정이 어떠했든 결과적으로 북한의 4차 핵실험을 막지 못했고 개성공단을 폐쇄해 대화를 유지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마저도 없애버렸다. 정부는 통제되지 않는 북한만을 탓하고 있는데, 이런 파국을 막기 위해서 ‘대북정책’을 수립하는 것 아닌가. 즉,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은 파산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관계라는 관점에서 사드 배치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최소한의 외교적 조치를 요구하거나 적어도 실패한 대북정책에 대한 사과·설명·책임자 문책 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사드 배치 문제는 대통령이 정치권에 대안을 요구할 문제가 아니라 책임을 져야 할 문제이다.

21일 오후 서울역광장에 모인 경북 성주 군민들이 사드(THAAD) 배치 반대 상경 집회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이건 상식적인 정치만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나 하는 소리다. 박근혜 정권의 비상식적 정치에서는 이런 주장이 모두 ‘반대를 위한 반대’, 즉 적군의 것으로 치부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날 “모든 문제에 불순 세력들이 가담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을 철저히 가려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이런 1차원적 인식에 기반 한 비상식적 정치의 절정을 보여줬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제 조선일보, 새누리당 내 비박계 일부, 야당들, 성주군민 등이 모두 불순세력의 범주에 들어가거나 앞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있는 존재들이 되어 버렸다. 대통령이 2012년 대선에서 약속한 ‘100% 대한민국’은 이미 잊혀진지 오래다.

보수언론까지 들고 일어난 상황에서도 대통령이 우병우 민정수석을 내칠 수 없는 것은 내부의 적군에 대한 감시와 처벌을 ‘공작’을 통해 책임질 유능한 인재를 잃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도 소명의 시간까지 의로운 일에는 비난을 피해가지 마시고, 고난을 벗 삼아 당당히 소신을 지켜 가시기 바란다”고 말한 대목에서 우병우 민정수석을 쫓아낼 수 없는 대통령의 안타까운(?) 마음이 드러난다.

우병우 민정수석이 조선일보가 내린 고난을 이렇게까지 겪으면서 해야 할 일, 그러니까 그가 책임져야 할 ‘소명’과 ‘의로운 일’과 ‘소신’이란 과연 무엇인가. 지금까지 보도된 내용들로 보면 모든 체계와 상식을 거슬러 수사기관과 정보기관의 인사를 장악해 청와대가 직접 장악·통제하는 것이다. 국정원과 검찰의 정치적 독립이나 개혁은 청와대가 모든 걸 틀어쥐고 통제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지만, 박근혜 대통령에게 이런 주장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일본 전국시대 고사에 등장하는 한 무장은 주군으로 모셨던 가문의 부흥을 위해 “나에게 칠난팔고(七難八苦)를 달라”고 달에게 빌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가 고난을 요구한 것은 ‘주군 가문의 부활’이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고, 고난을 겪어야만 이걸 이룰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여기서 묻고 싶다. 도대체 박근혜 대통령이 검찰과 국정원을 장악하고, 이를 통해 불순세력을 마구 제거하고, 사드 배치를 결국 논란 속에 마무리 짓는, 이런 고집스런 무리수를 계속 두어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니까 적을 배제하고 ‘아군들’만 갖고 하려는 일이 도대체 뭔가?

어떤 이념의 구현도 아니고 정권재창출이라는 정치적 실익도 아닌 것 같다. 반대자들을 불순세력으로 모는 걸 봐서 민의를 올바로 대변해보자는 게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기성정치를 보는 상식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도대체 박근혜 대통령에게 ‘정치’란 무엇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이 의문이 풀리지 않는 게 이 정권의 최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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