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은 개돼지”라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지만, 사실 그게 나향욱 정책기획관의 어떤 ‘철학적 결론’인지는 조금 의문이다. 본인 스스로도 “나는 1%는 아니지만 거기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여기서 어떤 ‘열등감’의 키워드를 얻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가 교육부의 정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요직에 있는 것은 맞지만 기자들 앞에서 세치 혀를 잘못 놀려 쫓겨날 위기에 놓였다는 사실은 그가 ‘개돼지’들의 분노에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의 허약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과연 그가 그걸 몰랐을까? 가장 먼저 드는 의문은 왜 고위 공무원이라는 사람이 학습능력이 이렇게 떨어지느냐는 거다. 그보다는 훨씬 더 ‘상위 1%’에 어울리는 직책으로 꼽을 수 있는 국무총리도 기자들 앞에서 말을 함부로 하다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박근혜 정권에서 그대로 승승장구 했으면 충청대망론으로 어디까지 올라갔을지 알 수 없었을 사람이다. 언론의 힘이 이렇게 무섭다. 경향신문 기자들은 사석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계속 해명 기회를 줬다고 하지만 나향욱 기획관은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이쯤 되면 재앙을 자초한 것에 가깝지 않은가?

무책임한 추측이지만 그가 평소 정말로 민중을 개돼지로 여겼다기보다는, 민중을 개돼지로 여겨도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 게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 와중에 마침 이른바 ‘야당지’ 기자들을 만났으니 쓸데없는 센 척을 해본 게 아니겠는가. 내가 이렇게 민중을 개돼지로 여기는 강한 사람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신분제 사회를 공고히 해야 한다”는 말의 함의 역시 달라진다. 그 ‘신분제 사회’ 안에서 나향욱 기획관의 위치가 남을 지배하고 짓밟는 강자의 것 이여야 한다는 게 중요하다. 이렇게 우리는 이 부족한 고위 공무원의 내면에서 우울한 약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민중은 개·돼지"라고 발언해 물의를 빚은 나향욱 교육부 정책기획관이 11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의원 질의에 대한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글에서 굳이 나향욱 기획관을 ‘찌질한 약자’로 묘사하는 건 그를 이해하거나 보듬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당연히 이런 말을 공공연히 하는 고위 공직자에게는 엄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과는 별개로 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등장했는지 그 자체를 규명할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처한 사회에 대해 좀 더 많은 이해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바퀴벌레 공포증을 치료하는 방법을 예로 들어보자. 1마리의 바퀴벌레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여 마릿 수를 늘려가며 익숙하게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또는 한 번에 1만 마리의 바퀴벌레를 한꺼번에 보여줘 1마리 정도는 봐도 괜찮은 상태로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나향욱 기획관을 법적으로 처벌하거나 내쫓거나 징계하는 등의 방법은 이런 종류의 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바퀴벌레 공포증자가 그런 공포증을 갖게 된 근본 원인을 이런 방법으로 해소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향욱 기획관이라는 증상을 노출한 한국 사회 그 자체를 카우치에 눕힐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사실 나향욱 기획관을 하루 하루 아등바등 살아가는 약자의 위치에 놓고 보면, 그의 주장이 우리 주위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논리와 별다를 게 없음을 깨달을 수 있다. 경쟁의 사다리를 끝까지 올라가면 민중을 개돼지로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세상에서 사회적 평등이나 민주주의, 공동선 같은 것은 허울 좋은 얘기에 불과하다. 영화 ‘타짜’에 등장해 이해불가의 명연기를 보여준 아귀도 말하잖는가. “법? 아직도 그런 뜨뜻미지근한 걸 믿어?”

우리는 어느새 더 이상 명분이나 가치를 믿지 않는다. 약육강식의 시대에서 오로지 남을 짓밟고 올라서는 것만이 유일하게 살아남는 길이다. 어느 언론인은 박근혜 시대의 시대정신을 ‘각자도생’이라고 표현했다. 심지어 권력을 가진 정치인이나 관료들도 어떻게 해서든 혼자 살아남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만이 ‘헬조선’의 탈출구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를테면 얼마 전 문제가 된 ‘크리에이티브 코리아’라는 황당한 사건이 그렇다. 표절 논란은 일단 뒤로 미뤄놓자. 국가브랜드를 만드는 일은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매 정권마다 해야 하는 일인지는 의문이다. ‘크리에이티브’라는 단어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창조경제’가 연상돼야 한다는 의지가 담겨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 정권의 남은 정치적 수명은 2년에 훨씬 못 미친다. 다음 정권이 되면 바꾸거나 폐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애초에 광복 6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를 알리고 어쩌구 저쩌구 했던 그런 ‘명분’ 따위는 애초에 중요하지 않았던 거다. 박근혜 정권의 정치적 이득을 모색한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진실은 아마도 ‘30억 원이나 되는 예산이 어디로 갔느냐’는 대중적 의문에 있을 거다.

대학생들의 단체 카톡방 사건에서 우리는 마찬가지의 기만적 태도를 발견한다. 남학생 가해자들의 주장은 한결같다. 원래 ‘사나이’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말한다는 거다. ‘사나이’들끼리 있는 공간에서 좀 이랬기로서니 그게 무슨 흠이 되느냐는 거다. 남성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여성에 대한 성적대상화는 스스로 부끄러워할 일이지 자랑스러워 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의 인식 속에 ‘부끄러워할 일’이라는 원칙, 당위 즉 ‘선비질’이 차지할 공간은 없다. 오로지 왜곡된 욕망과 그걸 인정받고 싶은 1차원적 충동만이 상황을 지배한다.

최근까지 우리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여러 안전사고들은 모두 ‘명분’을 믿지 않는 기만적 태도들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규정이 있어도 지키지 않고, 직업 윤리도 내던진다.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장치’들은 늘 작동하지 않는다. 어떤 수칙 같은 것은 ‘효율성의 추구’를 위해 무시된다. 이건 세월호 참사부터 공시생의 정부청사 침입 사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사건들에서 반복해서 발견되는 바다. 세월호가 배의 안정성을 해치는 불법 개증축, 스태빌라이저 등 고장난 안전장치들의 방치, 일상적인 과적, 이를 위한 평형수 배출 등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온갖 보안조치에도 불구 공시생이 정부청사에 너무나 쉽게 침입할 수 있도록 만든 요소들과 사실상 일치한다. 모두 명분과 당위, 원칙을 우습게 여기고 기만적으로 대한 결과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향욱 기획관은 자기도 모르게 ‘시대정신’을 말한 셈이다. 그 자리에서 논쟁의 발단이 됐다는 국정교과서 문제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이를 반영하고 있다. 사람들 생각에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를 모색하는 건 아버지의 역사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다. 정부가 국정교과서의 온갖 장점들을 거론하지만 그것은 모두 허망한 명분에 불과하다. 기자들이 그걸 지적하면서 명분을 말하자 개돼지 얘길 꺼낸 것이다. 이 에피소드를 종합하면 결국 기득권이 말하는 ‘효율성의 추구’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가 드러난다. 오늘날에는 이 효율성의 추구마저도 명분이나 당위를 위한 게 아니다. 결국 각자의 ‘사익’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문제제기는 나향욱 기획관의 퇴출이라는, 그 지점에 멈춰서만은 안 된다. 우리가 ‘개돼지의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면 이 사회가 기만적으로 대하는 원칙을, 많은 사람들이 쉽게 우습게 여기는 어떤 명분과 당위의 힘을 되살려야 한다. 냉소에 맞설 것을 정치에 요구해야 한다. 공공선을 되살려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가끔은 우리가 여전히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좀 더 많은 행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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