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정세가 요동친다. 한국은 한반도 내 사드 배치를 공식화했고 일본 참의원 선거는 집권 자민당을 비롯한 개헌 추진 세력이 ‘대승’을 거뒀다. 선거 기간 동안 개헌 이야기는 꺼내지 않겠다던 아베 신조 내각은 개헌 찬성 세력이 개헌선을 넘기는 성과를 거두자 본격적인 평화헌법 개정 추진을 다음 과제로 내세울 태세다. 한반도 사드 배치를 미국이 추진하는 MD 체제로 규정하는 중국·러시아와 ‘전쟁할 수 있는’ 일본·미국의 힘겨루기가 동아시아 정세를 위태롭게 할 예정이다. 어느 신문은 그래서 ‘동아시아 신냉전의 부활’이라고 까지 쓰고 있다.

누구는 중국과 결별하는 것이냐고 묻고, 또 누구는 ‘반미친중은 운동권 본능’이라고 하지만 이런 상황은 애초에 박근혜 정권이 친중행보를 할 때부터 충분히 예상됐던 바다. 박근혜 정권이 중국과 관계를 급속도로 개선하고 일본과 거리를 뒀던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나는 북한을 통제하는데 중국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한 점이고, 또 하나는 어차피 때가 되면 한미일 공조를 요구하는 미국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테니 그 전에 중국에 대한 충분한 배려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지난해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미국 하원 의회에서 연설을 하는 등 예정했던 ‘때’가 곧 올 것으로 예상되면서 박근혜 정권 외교정책의 추는 한미일 공조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역사문제를 고리로 중국과 반일전선을 형성했던 박근혜 정부는 지난해 말 그간 한일관계의 ‘의도된 장애물’로 여겨졌던 위안부 문제를 극적 협상을 통해 해소(?)했다. 이후 북한이 4차 핵실험까지 강행하면서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고전적 냉전구도는 피할 길이 없어져 버렸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부총재직을 한국이 잃은 것도 단지 홍기택 전 산은회장의 문제라기보다는 이런 구도의 반영으로 볼 필요가 있다.

한미일 대 북중러 구도가 우려되는 것은 이 상황 속에서 한국이 국제정치적 주도권을 확보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부터의 남북관계는 미국과 중국 두 패권국가의 힘겨루기라는 종속변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남북관계의 변화로 인해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한반도 주민들이 오히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모든 수단을 잃는 사태에 직면한 것이다.

9일 오후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북한의 SLBM 발사 소식을 전하는 TV뉴스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위기는 기회라고도 했다. 바로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남북관계 개선을 모색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진다는 얘기다. 대북문제는 한국이 당사국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한국 정부의 목소리가 우선되어야 한다. 남북의 당사자들이 어떤 형태로든 관계 개선을 위한 준비를 해야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는 비극을 막을 수 있다.

물론 이런 주장은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북한이 4차 핵실험을 강행하고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이나 무수단 미사일과 같은 위협적 군사수단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상황에서 대북제재를 통한 일종의 고사작전 외에는 쓸 수 있는 카드가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미국이 김정은을 인권범죄자로 통보해 정치적 압박을 가하는 판국이다. 차기 미국 대통령이 누가 되든 대북 강경책을 쓸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런 ‘압박’은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동아시아 정세에서 완전히 코너에 몰린 이후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해 단독으로 북한과 협상을 강행한 아베 신조 정권의 재치(?)를 배울 필요도 있다. 아베 신조 정권이 실제로 납북자 문제에 대한 협상 결과를 내거나 이를 통한 큰 직접적인 외교적 이득을 거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단독으로 북한과 협상할 수 있는 ‘카드’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외교적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게 사실이다. 한국 역시 당장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더라도, 또 다소 미국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북한과의 대화와 협상을 지속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를 위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청와대 참모진과 주무부처 장관을 교체하는 것이다. 정확히는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다. 김관진 실장은 군 출신으로서 박근혜 정권의 외교안보정책을 협소한 관점으로 운용해왔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윤병세 외교부 장관 역시 청와대의 입장에 끌려 다니기만 해 지금의 상황을 만든 책임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좀 더 넓은 눈으로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인사와 체제가 필요하다.

마침 박근혜 대통령은 개각을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미래창조과학부, 문화체육관광부, 환경부, 고용노동부 장관의 교체가 직접적으로 거론된다. 상식적으로 보면 외교안보 사안이 첨예하게 제기되는 이때에 외교안보라인을 교체하는 것은 부담이다. 인사 교체 대상에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외교부 장관이 포함되더라도 박근혜 정권이 북한과의 대화 등에 나설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크지 않다. 오히려 ‘대화 공세’를 하고 있는 쪽은 북한인데, 이를 두고는 “통미봉남이 아닌 통남봉미”라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대화를 하자는 북한에 호응하면 미국과의 대북제재 공조는 깨질 수밖에 없는데, 이는 박근혜 정권이 원하는 바가 전혀 아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어차피 잃을 것이 없는 상황 아닌가.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비상식을 감수하고 가야할 때도 있다. 동아시아 정세에서 주도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수단을 시급히 찾지 못하면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 내에 외교적으로 그 어떤 성과도 낼 수 없게 된다. 만일 이 구도가 앞으로 상당 기간 깨지지 않을 거라고 전제하면 한국인들은 앞으로 그 기간 동안 군사 도발을 반복하는 북한을 어찌할 방도도 없이 그대로 머리 위에 이고 살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게 아니라면, 북한 체제의 붕괴를 모색해야 하는데 중국이 뒤를 봐주는 한 그러한 일은 현실이 되기 어렵다. 실제 박근혜 정권의 주요 인사들이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지금까지 북한붕괴론을 신봉하는 모습을 보여 왔지만 아직도 체제 붕괴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일부 극단적인 보수세력이 말하는 것처럼 힘으로 미국과의 공조 하에 힘으로 북한을 무너뜨리는 선택을 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한반도에 전쟁의 참화를 불러 온다는 점에서 절대로 고려할 수 없는 선택지다.

그러니 어차피 대화와 협상이라는 한 가지 답밖에 없다. 미국과 중국에 그저 끌려 다니며 눈치만 보는 안이한 대처로 어떻게 이런 난세를 현명하게 헤쳐 나가겠는가. 박근혜 정권의 대북정책 문제는 이명박 정부로부터 잉태된 것이다. 이제는 다음 정권을 위해서라도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인수위 시절 대북 비둘기파를 고사시키는 방아쇠가 된 ‘최대석 미스테리’를 바로잡을 때가 온 것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을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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