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이 사건 합병의 특수한 사정, 즉 구 삼성물산(주) 주가가 낮게 형성될수록 이재용 등의 이익이 커지고, 이재용 등이 구 삼성물산(주)의 경영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는 점과 기업집단을 지배하는 동일인에 의한 기업집단 내 회사의 사업내용에 대한 사실상 지배는 그 성질상 구체적인 지배력 행사 과정 등에 대한 뚜렷한 흔적이 남기 어렵다는 점까지 보태어 보면, 구 삼성물산(주)의 실적 부진이 이재용 등의 이익을 위하여 누군가에 의해 의도되었을 수도 있다는 의심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지난달 31일 서울고등법원 민사35부(판사 윤종구 양시훈 박옥희)는 삼성물산이 주주들에게 제시해야 할 주식매수가격을 6만6062원으로 결정하면서 이같이 판시했다. 지난해 삼성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을 합병하는 과정에서 삼성물산의 주식매수청구 가격을 5만7234원으로 산정하고 두 회사 간 합병비율을 1대 0.35로 정했는데, 법원이 이를 뒤집고 주주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법원은 삼성물산의 주가가 낮게 형성될수록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일가가 이득을 보게 되는 삼성의 특수한 사정 때문에 삼성물산의 실적 부진과 실적 발표 연기가 의도됐을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다.

삼성 입장에서는 악재다. 당장 이건희-이재용 일가가 수천억원의 지분 이익을 취한 것이 문제가 된다. 더불어민주당 제윤경 의원실은 분석에 따르면 법원 결정에 따라 합병가액을 재산정할 경우 합병비율은 1대 0.4가 되고, 삼성물산 소액주주(57.4%)들은 5238억원의 지분 손실을 입은 반면 이씨 일가는 3718억원의 이득을 취한 꼴이 된다. 제윤경 의원은 “삼성물산에 대해 1.4% 지분만을 보유했던 이건희 일가는 합병을 통해 삼성물산을 완전히 지배하고 결과적으로 삼성전자의 지배력도 강화했다”며 “(이는) 이재용의 경영권 승계와 재산형성을 위한 삼성그룹 차원의 제3차 편법적 부의 이전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한겨레 6월 1일자 3면
▲한겨레 6월 3일자 1면

삼성이 법원 결정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이 결정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에서 이재용 부회장으로 이어지는 삼성의 경영권 승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 전문기자인 한겨레 곽정수 선임기자는 <허찔린 ‘불공정 합병’…이재용의 지배력 강화 차질>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번 법원 결정이) 삼성 3세 승계에 미칠 영향도 주목된다”며 “애초 삼성물산 합병의 주목적은 이 부회장의 지배력 강화라는 게 시장의 지배적 분석이었다. 이번 결정으로 이 부회장의 이런 지배력 강화 시도가 정당성에서 큰 타격을 입게 됐다”고 분석했다.

곽정수 기자는 “1990년대 후반 삼성에버랜드 전환사태 헐값 인수로 대표되는 편법·불법 상속 논란, 이어 2000년대 삼성에스디에스 일감 몰아주기 논란과 함께 삼성물산-제일모직 간 불공정 합병 논란이라는 불명예스런 훈장이 추가된 셈”이라며 “삼성이 이 부회장의 지배력 강화를 위해 구상 중인 계열사 합병이나 지주회사 전환에도 상당한 부담이 따르게 됐다”고 지적했다. 삼성은 재항고할 계획이다.

이밖에도 이번 법원 결정으로 정부가 삼성 경영권 승계 작업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에도 제동이 걸릴 수 있다. 법원은 삼성물산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이 합병을 결정한 이사회 결의 전 두 달 동안은 삼성물산 주식을 지속적으로 매도하면서 역설적으로 주주총회에서 합병에 찬성한 것을 문제삼았다. 법원은 “물론 국민연금이 정당한 투자 판단에 근거해 삼성물산 주식을 매도했을 가능성도 있다”면서도 “국민연금의 주식 매도가 정당한 투자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을 배제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삼성 입장에서 이번 법원 결정은 예상치 못한 악재다. 흥미로운 대목은 언론이 법원 결정의 의미를 보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법원이 1심을 뒤집고 삼성에 불리한 판단을 내렸다면 그 의미를 분석하고, 삼성 경영권 승계 과정에 미칠 영향을 전망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다. 그렇지만 한겨레 정도를 제외한 대다수 언론은 법원 결정문 정도만 단순 스트레이트 기사로 처리했다. 최대광고주인 삼성에 불리한 결정이라 언론이 적극적으로 달려들지 않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법하다.

제윤경 의원은 미디어스와 통화에서 “법원은 소를 제기한 원고의 의심이 정당하다는 것이고, 의원실 분석은 법원 결정을 기초로 국민연금이 581억원의 손해를 봤고, 삼성 일가가 3718억원의 지분 이익을 얻었다는 것이다. 언론 입장에서는 가뜩이나 부담스러운 삼성에 대한 기사를 쓰기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법원 결정의 이면에는 파고들 것이 많다. 구체적인 정황과 분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문제를 더 깊게 파고 들어가는 언론이 한겨레를 제외하곤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언론이 독자에게 “우리는 광고주 눈치 보지 않고 할 말은 한다”고 할 수 있으려면, 지금 삼성을 문제 삼아야 한다는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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