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이 여소야대 국회에 친기업 정서를 부추기기 시작했다. 이 신문은 최근 사설을 통해 끊임없이 정부와 국회에 대고 여론시위를 벌였다. 정부에 대해서는 경제 전반에 있어서의 규제완화를 요구했다. 특히 이 신문은 노동계가 여소야대 국회를 활용해 반재벌 투쟁을 본격화하고 있고, 이런 흐름에 친노동적인 야당이 가세한다면 우리 나라 경제에 엄청난 부담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경제신문은 30일자 신문에 <여소야대 편승해 반기업 투쟁 본격화하는 민노총>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이 신문은 최근 민주노총이 반재벌 투쟁을 선언하고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비롯해 기업들을 찾아다니며 정치 집회를 벌이고 있다며 “노동계가 반기업 정서를 부추기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또 “노동계의 이 같은 투쟁은 가벼이 볼 일이 아니다”라며 “노조조직률이 10.3%에 불과한 데다 대기업 노조의 기득권만 지킨다는 이유로 ‘귀족 노조’로 지탄받아온 노동계가 ‘반재벌’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내걸고 있는 것이다. 구조조정은 물론 경기 침체, 실업문제 등을 모두 대기업그룹 책임으로 몰아가고 재벌개혁을 정치 이슈화하겠다는 전략”이라고 썼다.

여소야대 국회가 노동계의 반재벌 투쟁에 동참하면 다 같이 죽는 꼴이 된다는 게 한국경제신문 주장이다. 이 신문은 “우리 경제의 어려움이 글로벌 경기 부진, 중국의 성장 둔화, 유가 불안 등 대외 요인 때문이란 건 누구라도 잘 안다. 내수 부진 역시 기업도 함께 겪는 고통이다. (중략) 특히 여소야대 정국에서 친노동적인 야당이 가세해 정치 이슈화한다면 나라 경제엔 엄청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다 같이 죽자는 죽음의 선동이다”라고 썼다.

▲한국경제 2016년 5월 30일자 사설

한국경제신문의 주장은 뚜렷하다. 이 신문은 그 동안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정규직 노조의 특권 때문이라며 정규직 노조의 기득권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원청에 달려가자 ‘하청노조에 원청 기업이 떨고 있다’는 식의 주장도 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신문의 최대주주는 현대자동차(지분율 20.55%)이고, 189개 기업이 이 신문의 주주다. 주축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원사다.

이런 신문이 20대 국회에서 제3당으로 키를 쥔 국민의당에 “유연한 노동시장 설계에 정책 우선순위를 두라”는 취지의 조언을 하고, 정치권이 구조조정을 앞둔 조선소를 찾아가자 “가뜩이나 험로인 조선업 구조조정을 더 꼬이게 하지나 않을지 심히 걱정스럽다”고 쓰고, 중소기업 적합업종 제도와 대형마트 규제에 불만을 품고, 김영란법 시행령안을 두고 “3만원 넘는 음식, 5만원 넘는 명절 선물세트를 뇌물로 간주하게 돼 그 파장을 짐작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것은 놀랍지 않다. 오히려 자신과 주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가장 솔직한 입장일 수 있다.

다만 흥미로운 점은 여소야대 국면을 맞이한 대기업이 무엇을 당면과제로 생각하는지 한국경제신문의 최근 사설들을 통해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여소야대 국회에서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악이 뒤집어질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기업과 보수신문은 야당과 노동계가 반재벌 전선을 펴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고, 자본의 입장에서 구조조정을 단행할 수 있도록 여론전을 펼치고, 국민의당의 우경화를 유도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특히 야당에 대고 ‘죽음의 선동에 동참하지 말라’ 주문하는 대목에서는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한국경제신문은 “문제는 (노조의) 이 뜬금없는 ‘반재벌’ ‘반기업’ 같은 선동적인 프레임이 대중에게 먹혀든다는 사실이다”라고 썼다. 이 말을 거꾸로 해석하면, 박근혜 정부에서 효과를 발휘했던 ‘반노조’ 전략이 저항에 부딪혔다는 이야기다. 대선을 앞두고 예상을 뒤엎고 만들어진 여소야대 국회가 이들 입장에서는 최악의 국회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경제신문이 정확히 표현한대로 한국사회에서 노동의 문제가 어떻게 풀릴지는 결국 세력관계와 여론의 문제다. 노동조합이 자신의 문제를 어느 정도 수준까지 관철할지는 결국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노조에 가입했고, 지금 노동자운동의 구호가 얼마나 많은 대중을 대표하는지에 달렸다. 그리고 노동과 자본, 그리고 관리계급의 계급형세에 달렸다(한국경제신문의 우려와 달리, 노동계에서는 여소야대 국회에 큰 기대를 않고 있다).

한국경제신문의 사설들은 최근 자본과 노동을 둘러싼 형세를 대기업의 시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IMF 이후 한결 같은 프레임으로 말이다. 그래서 이 신문의 사설들은 ‘죽음의 선동’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이 신문과 주주들이 그토록 바라던 노동유연화가 우리 사회에 가져온 부정적인 효과들이 참사를 낳고 있는 탓이다.

지난 1~2월 삼성전자의 스마트폰을 만들던 파견노동자들은 1960~1970년대에나 있었던 산업재해를 당했고, 지난 28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는 홀로 스크린도어를 고치던 외주업체 노동자가 열차에 끼여 숨졌다. 한국경제신문이 우려하는 대로 대중의 분노는 원청인 삼성과 서울메트로를 향한다. 지금 대중은 과거의 프레임에서 조금씩 이탈하고 있다.

언제까지 철지난 프레임으로 자본의 이익을 대변할 것인가. 언제까지 죽음의 선동을 이어갈 것인가. 제아무리 자본과 운명공동체인 언론이고, 신문의 위기에도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언론사라고 하지만 ‘우리 사회의 풍요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글로벌 종합경제미디어’를 비전으로 삼고 있다면 자본에도 할 말은 해야 한다. 대기업에 다단계 하도급과 파견 노동 활용을 자제하고, 위험을 외주화하지 말라고 촉구해야 한다.

“함께 살자”는 노동 구호를 “다 같이 죽자는 죽음의 선동”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제 대중에게 먹혀들지 않는다. 한국경제신문은 구의역 사고에 대해 어떻게 답할 건가. 지하철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지 못한 스무살 청년의 잘못인가? 서울메트로의 계열사 정규직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집회에 참여했던 젊은 노동자 때문에 공기업이 휘청거렸다고 생각하나? 그래도 비용절감을 위해 외주화를 유지해야 하나? 죽음의 선동은 바로 당신과 당신이 대변하는 자본이 해왔던 것 아닌가.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