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7일 오전 1시, 강남역 근처 한 상가 건물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살해됐다. 조현병을 앓고 있던 30대 남성 가해자는 남성들은 모두 돌려보내고, 화장실에 들어온 첫 여성이었던 피해자를 흉기로 찔러 죽였다. 화장실에 들어온 ‘여성’을 노린 점, 경찰 조사에서 “여자들이 나를 무시했다”고 한 진술 등으로 미루어 보면, 소위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은 이미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여성혐오’가 실제적 위협과 피해로 드러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사건이 일어난 현장 부근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죽음을 추모하고 여성혐오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는 수많은 포스트잇이 붙었고, 여성들은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꺼내어’ 말하기 시작했다. 5월 17일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이 ‘여성혐오의 구체화’ 사례로 나타나며 ‘사회적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만을 겨냥한 범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8개 단체가 연대한 한국여성단체연합 인권위원회는 26일 오후 7시, 서울시민청에서 <강남 ‘여성 살해’ 사건 관련 긴급 집담회-대한민국 젠더폭력의 현주소>를 개최했다.

<‘살아남은’ 우리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 혐오, Misogyny, 젠더폭력>의 발제를 맡은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번 사건을 ‘혐오 혹은 증오범죄’이자 ‘여성 살해 범죄(페미사이드)’로 보았다.

이나영 교수는 “이번 사건이 젠더폭력인 이유는 성차별적 사회 속에 구성된 “남성성/여성성의 위계적인 젠더 (물리적, 상징적) 질서를 확인하고 강화하는 폭력이 되기 때문”이라며 “여성들에게 이 사건은 남성 중심 사회 속에 오랫동안 존재해 온, 일상의 편견, 무시, 비하, 멸시, 조롱, (성적) 대상화, 괴롭힘, 혐오발언, 제도적 차별, 폭력, 강간, 살해라는 젠더폭력의 징후적 표출로 읽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서초구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있던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추모 포스트잇과 조화들이 서초구청 로비에 옮겨 전시돼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이나영 교수는 이번 사건 이후 이어진 추모 열기와 필리버스터에 대해 △대중 공간에서 ‘일반’ 여성에 대한 살해가 일어나 ‘나도 당할 수 있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여성들 스스로 불안과 공포, 경험을 돌아보고 가시화되게 된 계기가 된 점 △다른 여성들의 경험에 공감하는 청중이 탄생한 점 덕분에 ‘바로 지금’ 이런 일이 가능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데에 동의하며 온라인 공간에서 일상의 지식 토대를 마련하는 여성들이 등장했다. 이렇게 육화된 지식은 건드릴 수가 없다. 또한 이들은 지지와 연대를 온라인을 통해 모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며 “남성들은 (이 같은 움직임에) 불편함을 표현하고 ‘경기’를 일으키기도 하는데, 이는 남성들이 공기처럼 누리고 있는 특권과 우월적 지위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혐오표현과 혐오범죄: 법개념과 사회적 의미, 법규제와 사회적 대응> 발제를 맡은 홍성수 교수는 “혐오표현이라는 문제가 혐오범죄라고 하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면서도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만연해 있는 한국사회에서 언젠가는 폭력적 ‘형태’가 드러나리라고는 예상했지만,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개인적으로 많이 놀랐다”고 밝혔다.

홍성수 교수는 “혐오범죄라는 말보다 증오범죄라는 말이 어떤 ‘속성’을 드러내는 데 더 좋다고 생각한다. 소수자성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하고, 폭행이나 살인 등 기존에 있었던 범죄를 저지를 때 그 동기가 일정한 편견에 기반하고 있을 경우를 증오범죄라고 한다. 이는 새로운 범죄 유형이 아니라 동기가 더 나빠서 가중 처벌되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다른 나라에서는 증오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고 수사기관이나 법원 등에도 경각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증오범죄법을 만들고 있다”면서 “(국내에서의) 증오범죄법 제정 요구는 좋다고 생각하는데 혐오 정서를 완화시킬 의지가 전혀 없으면서 법만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젠더의식에 대한 고민 없는 대다수 언론, 사회적 갈등 심화시켜”

성범죄나 여성 대상 범죄가 일어났을 때 대중의 분노를 가중시키는 것은 사건의 ‘잔혹함’만이 아니다. 2차 가해자로 명명해도 좋을 만큼 젠더의식이 결여된 언론 보도 역시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된다. 이번 강남역 사건을 두고도 언론은 과거에도 저질렀던 잘못을 되풀이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또한 “언론은 범행 당시 CCTV를 여과 없이 반복 노출하는 자극적인 보도로 국민의 공포와 분노를 유도했고, 여성혐오 논쟁 보도를 통해 사건의 본질을 흐렸으며, 조현병 환자를 강력범죄와 연결하며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을 심화시켰다. 그러나 사건의 근본적 문제를 진단하고 비판하는 ‘대안 보도’는 부재했다”고 꼬집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8개 단체가 연대한 한국여성단체연합 인권위원회는 26일 오후 7시, 서울시민청에서 <강남 ‘여성 살해’ 사건 관련 긴급 집담회-대한민국 젠더폭력의 현주소>를 개최했다. ⓒ미디어스

최지은 아이즈 선임기자는 <'OO녀'는 어떻게 탄생하고 죽어가는가 - 한국 언론의 젠더의식 부재>에서 특히 성범죄와 관련해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언론 보도 행태를 지적했다. 아이즈는 리벤지포르노, 몰카 등이 올라와 논란이 됐던 음란물 사이트 소라넷의 운영자 시점에서 쓴 기사, ‘총각 딱지’ 운운하며 그릇된 결혼관을 노출한 기사 등을 비판한 <언론의 젠더의식은 언제쯤 개선될까>(링크)로 ‘이것은 염치의 문제’라며 ‘다른 숙련된 직업인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능력과 체계를 복원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최지은 기자는 “그동안 언론은 남성 가해자에 의해 여성 피해자가 발생한 사건에서도 사건 내용과 여성을 부각시키면서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달아왔다. ‘대장내시경녀’, ‘신고녀’, ‘고소녀’, ‘성폭행피해녀’ 등 여성이 가해자일 때도 피해자일 때도 ‘~녀’라고 불렀다. (이런 보도에 대한) 여성들의 지속적인 분노와 스트레스가 존재했다”고 말했다. 이어, “SNS에서는 가해자 성별 표기 운동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성을 인간 기본값으로 두고 여성만 성별을 표기하는 것은 차별적이기도 하지만, 자극적인 헤드라인마다 대부분 가해자 성을 지우고 여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지은 기자는 “성범죄 보도 관련해서도 가해자가 범행을 저질렀을 때 했던 말을 기사 제목에 쓰거나, 범행 당시 상황에 대해 연출된 그림이나 사진을 통해 관음증적인 시선을 보인다. 거의 포르노적인 전시라고 생각하는데, 여성의 수동적인 모습을 강조하고 가해자에게 감정이입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기에 ‘나도 ~해 버리고 싶다’ 등의 2차 가해성 댓글까지 달린다”면서 “한국기자협회가 만든 인권보도준칙에 우리가 상식적이고 공정하고 윤리적이라 생각하는 원칙들이 다 있다. 그걸 아무도 지키지 않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중요한 것은 한국 언론들의 다수가 젠더의식에 대한 기본적인 고민도 없이, 혹은 왜곡된 의식을 일부러 퍼뜨리며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키고 실질적 피해자들을 양산해내고 있다는 사실”이라며 “지금의 여성혐오 풍토와, 현실에서 벌어지는 범죄에 대해 언론은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한 언론이 과연 공적 매체로서 존재해야 할 가치가 있는가. 사회 각 분야의 부조리와 병폐에 대해 비판할 자격이 정말로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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