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가 아니라 ‘콘텐츠’가 단위별로 쪼개져 경합하는 시대다. 김익현 지디넷코리아 미디어연구소장이 21일 이화여대에서 열린 한국언론학회 정기학술대회 <플랫폼의 진화와 미래 콘텐츠> 쟁점토론에서 설명한 것처럼 “플랫폼이 중심적인 미디어 소비 공간이 되면서 미디어콘텐츠의 패키지가 해체되는 중이고 미디어의 편집행위가 소비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줄어들고” 있다. 닥본사(닥치고 본방사수)의 시청행태는 사라진지 오래고, 이제 시청자(또는 이용자)는 보고 싶은 것만 골라 본다. TV를 켜고 본방송을 보는 시청자도 있지만, 포털 같은 다양한 플랫폼에서 하이라이트 영상클립만 보는 이용자가 급증하고 있다. 매스미디어와 방송콘텐츠를 둘러싼 조건이 달라졌고, 앞으로 더 빠른 속도로 변화할 것이다.

사람이 몰려드는 콘텐츠와 플랫폼을 만드는 사업자들이 전망하는 미래의 미디어콘텐츠는 ‘매스미디어’가 만들어온 콘텐츠의 포맷과 문법과는 분명 다르다. 김익현 지디넷코리아 미디어연구소장은 “생산의 전문가만이 아니라 콘텐츠 영역의 전문가가 미디어에 뛰어들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예지 SM엔터테인먼트 콘텐츠기획실장은 “지금 미디어콘텐츠시장은 ‘직거래’ 시장이 됐다”며 “브로드캐스팅의 역할이 조금씩 사라지고 내로우캐스팅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해월 피키캐스트 대외커뮤니케이션 팀장은 “단시간에 재미를 주고 정보를 주고 설득하는 영상 콘텐츠의 파급력이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 21일 이화여대 ECC에서 열린 한국언론학회 <플랫폼의 진화와 미래 콘텐츠> 쟁점토론 (사진=미디어스)

물론 대중(mass)을 상대하는 미디어와 콘텐츠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사업자와 전문가들 전망이다. 오진세 CJ E&M MCN사업팀 팀장은 “매스(mass)의 개념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개인방송들은 재밌고 이용자 개인에게 맞춰져 있긴 하지만, 그곳에 투여할 수 있는 자원은 한정적이다. 그리고 (방송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 퀄리티를 높이려면 타깃을 넓힐 수밖에 없다. 지금의 매스(mass)와는 다르겠지만, 일반을 대상으로 한 콘텐츠는 계속 나올 것이다. 개인 콘텐츠들이 계속 성장해 융합하고,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이 달라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방송 콘텐츠 시장에서 매스미디어의 주도권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게 사실이다. 권오상 미디어미래연구소 방송통신정책센터장은 24일 서울 반포 메리어트호텔에서 열린 미디어리더스포럼에서 발표한 방송산업 영업이익률 분석 결과를 보면, 2008년 5.1%이던 영업이익률은 2014년 2.8%로 떨어졌다. 그런데 매스미디어의 바깥에서 미디어 콘텐츠를 생산하는 주체와 이를 활용해 이득을 얻는 플랫폼사업자들은 오히려 많아졌다. 플랫폼사업자들은 매력 있는 MCN을 섭외하려 줄을 섰다.

일례로 아프리카TV를 보자. BJ(Broadcasting Jockey)들은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시청자들은 자발적으로 값(‘별풍선’)을 치른다. 개인방송은 이미 하나의 산업이 됐다. 미디어 공급 측면에서도 소비 측면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중인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혹자는 “VOD(Video On Demand)가 방송산업의 미래 수익모델”이라며 기대감을 갖지만, 방송콘텐츠 시장에서 매스미디어의 점유율은 떨어지고, 매스미디어의 주도권이 약화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새로운 수익모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상파 등 대형 방송사들은 VOD에 광고를 붙여 유료로 판매하고, 여러 플랫폼에 제공하는 클립영상에 광고를 붙이는 등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 특히 프로그램 포맷을 수출하거나, 중국과 동남아시아에 프로그램 판권을 판매하는 것 등 속칭 ‘잭팟’이 터질 수 있는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최근 여러 방송사들이 비즈니스 조직을 확대하고 이를 중심으로 조직을 개편하는 이유다. 제작사 단위에서는 중국 자본을 지원받아 한류콘텐츠를 만드는 곳도 여럿 있다.

▲박상호 공공미디어연구소 연구팀장 (사진=미디어스)

이를 두고 박상호 공공미디어연구소 연구팀장은 25일 <방송 콘텐츠 산업의 문제점과 발전방향>을 주제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방송 콘텐츠 산업은 지상파 중심의 성장과 발전(1단계), 유료방송사의 플랫폼 확장에 따른 지상파 방송 콘텐츠의 2차 성장(2단계)을 거쳐 온라인 VOD 시장의 성장과 멀티 디바이스용 콘텐츠의 수요 증가와 한류(해외 수출 확대)라는 3단계 국면에 와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치 않다. 지상파방송사의 성장이 정체 중이고, 유료방송시장의 성장이 둔화하면서 대형 방송사들이 ‘해외’와 ‘뉴미디어’ 사업으로 눈을 돌리고 있지만 자본, 특히 중국자본에 종속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남표 MBC 전문연구위원은 “방송은 내수가 중심이고 한류는 보너스다. 자본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우리의 정서와 문화에 기반한 콘텐츠는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가면 (미디어산업이 중국자본에 종속된) 제2의 대만이 될 수 있다. 해외에 프로그램을 선판매하지 않더라도 내부적으로 버틸 수 있는 자생적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저널리즘의 약화도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중국자본은 기회다”라는 반론도 만만찮다. 1995년 중국에 진출한 아시아홈엔터테인먼트의 김원동 대표는 “차이나머니를 두고 말이 많다. 인재가 미국에 가면 ‘진출’이고 중국에 가면 ‘유출’이고, 미국 자본이 오면 ‘유치’이고 중국 자본이 오면 ‘종속’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떠돈다. 그러나 위기에 있던 초록뱀이 중국자본이 들어와서 살아났다. 오히려 고마워할 일 아닌가 싶다. 할리우드 자본을 활용하면서 고유한 색채를 만들어가는 영국처럼 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연성 HB엔터테인먼트 이사는 “내수시장을 탄탄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글로벌로 갈 수 있는 협력모델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공공미디어연구소(소장 김동준)는 25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 18층 외신기자클럽라운지에서 <방송 콘텐츠 산업의 문제점과 발전방향>을 주제로 토론회를 주최했다. 사회를 맡은 문철수 한신대 교수(미디어영상광고홍보학부)는 “한국의 방송산업은 아직 생명을 잃지 않은 상태다. 희망을 가져야 한다. 다만 과연 방송산업을 되살릴 골든타임이 얼마나 남았을까. 이러한 논의를 정책당국에서 관심을 갖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박상호 연구팀장은 정부의 제도적 지원과 사업자들의 적극적인 투자가 필요한 시기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미FTA와 한중FTA 발효로 방송시장이 개방되면서 방송 제작 시장에 기회 요인과 위협 요인이 동시에 존재한다”며 “방송콘텐츠 제작 경쟁력 제고를 위한 대응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중국 미디어 시장과 뉴미디어 시장의 성장은 국내 방송사 편성에 대한 부담을 낮추고, 새로운 유통 채널 확보 차원에서 긍정적인 변화”라며 방송사와 제작사들이 국내외 방영권 및 뉴미디어 채널 판권과 콘텐츠 파생상품을 거래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제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거대 방송사가 자생적 선순환 구조를 가지려면 ‘콘텐츠에 대한 투자’와 ‘공정한 거래’는 물론 ‘디지털 네이티브와 모바일 네이티브가 매력을 느낄 만한 콘텐츠’가 필수라는 것이 전문가들 생각이다. 오신제 CJ E&M MCN팀장은 “지금 대중의 고독을 해소할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미디어콘텐츠의 가능성과 가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익현 지디넷코리아 미디어연구소장은 “미디어의 지형이 넓어졌고 매스미디어도 타깃화한 버티컬(vertical) 구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성철 고려대 교수(미디어학부)는 “콘텐츠의 가치를 광고로 회수하는 것이 아닐, 플랫폼으로부터 제대로 된 가치를 정산 받는 구조를 정착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해월 피키캐스트 팀장은 “매스미디어가 내보내는 3%의 콘텐츠가 아니라 쌓여 있는 97%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가 중요하다”며 “소비자가 생산자임을 유념하고 인터랙션(interaciton)을 하는 요소를 고려해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상호 공공미디어연구팀장은 “방송의 사적영역에서 PP(방송채널사용사업자)의 제작 경쟁력을 강화하도록 정부가 대책을 마련하고, 그 동안 프리 라이딩(free riding, 무임승차)을 해온 유료방송사업자들도 넷플릭스처럼 콘텐츠에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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