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가 2003년 개정된 <KBS 방송편성규약>(이하 편성규약)을 ‘개정’이란 명목 하에 일방적으로 수정하려고 해 내부에서 반발이 나오고 있다.

“종합편성 또는 보도에 관한 전문편성을 행하는 방송사업자는 방송프로그램제작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취재 및 제작 종사자의 의견을 들어 방송편성규약을 제정하고 이를 공표하여야 한다”는 방송법 4조 4항에 따라 만들어진 편성규약은 2001년 공표된 후 2003년 노사 합의를 통해 한 차례 개정된 상태로 13년 간 유지돼 오고 있는데, 고대영 사장은 편성규약 개정 의사를 수차례 밝혀 왔다. 문제는 보도와 프로그램 공정성 논란이 일거나 제작 과정에서 부당한 일이 발생했을 때 갈등 해소 역할을 하는 현재의 ‘공정방송위원회’(이하 공방위)가 담긴 현재의 편성규약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고, 무엇보다 ‘노조 배제’ 뜻을 공공연히 주장해 왔다는 데 있다.

고대영 사장이 손보려고 하는 개정된 편성규약은 내부에서 취재 및 제작 실무자들의 제작자율성을 수호하는 하나의 보루로 여겨져 왔다. 그만큼 △방송제작자의 양심 보호 △갈등해소를 위한 장치 등 각종 조항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토론을 감수하더라도 ‘방송 자유와 독립을 구현하고 프로그램 공익성과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취재 및 제작자율성이 강화된’ 편성규약을 만들려고 했던 당시 노사 양측의 성실한 태도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2001년 공표된 제정안보다 내용과 과정 모든 측면에서 진일보했다는 평을 듣는 ‘2003년 개정 당시’를 되짚어 보았다.

추상적이었던 ‘방송 독립’ 개념,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쪽으로 개정

2001년부터 시행된 제정안에는 ‘지켜지면 좋지만 강제하지는 않는’ 모호한 조항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제작실무자는 공사의 방송 목표를 실현하도록 자율적인 취재 및 제작 활동을 최대한 보장받는다’, ‘제작실무자는 제작된 프로그램이 자신의 양심에 반하여 수정되거나 취소될 경우 설명을 요청할 수 있다’, ‘공사의 사장은 (중략) 취재 및 제작종사자의 자율적인 활동을 보장함으로써 제작 질서의 실천적 조화를 이룬다’ 등의 조항이 대표적이다.

2003년 개정 과정에서 노측 위원들은 2001년 제정안이 △편성규약 기본철학이 없는 ‘편성권 독점에 관한 KBS 경영진의 선언’이고 △현업 보도·제작자에 대한 자율성 보장이 없으며 △사측이 주장하는 편성권은 가공의 허위개념이고 △인사와 재정에 대한 참여 문제가 빠져 있으며 △보도·제작 부문 갈등을 조정할 제도적 장치가 없다는 점을 지적해 이를 개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결국 개정안에 방송 자유와 독립, 자율성을 침해 받는 일이 벌어졌을 경우 조정과 해결을 할 수 있는 ‘노사 동수’ 편성위원회가 명시화돼 제작자율성을 보다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방향으로 변했다.

KBS 방송편성규약 2001년 제정안, 2003년 개정안 '편성위원회' 조항 비교 (표=미디어스)

위 표에서 볼 수 있듯 ‘편성위원회의 구성 및 개최’와 관련된 내용은 2003년 개정안에서 새롭게 들어간 것이다. KBS 노사는 ‘내외의 부당한 압력이나 간섭으로부터 자율성을 보호하고 취재 및 제작 실무자의 권한을 보장하기 위하여’ 편성위원회를 운영하는 데 합의했다. 보도본부, 제작본부, 라디오제작센터에 각 하나씩 총 3개의 위원회를 운영하는 한편, 전체 편성위원회를 두어 본부별 편성위원회에서 조정 및 해결이 되지 않은 사안을 다룰 수 있도록 했다.

편성위원회는 취재 및 제작책임자와 실무자 대표를 ‘노사 동수’로 두었다. 논의를 통해 각 5인 이내로 참석 가능한데, 갈등 조정 및 해결에 실효를 높이기 위해 책임자측 의원은 본부장·국장·부장급 이상의 간부들이 맡았다. △방송의 공정성 및 공익성의 훼손 △편성·보도·제작 과정에서의 제작자율성 침해 △정기 개편 시 의견과 방향 제시 △취재 및 제작 과정에서의 이견이나 분쟁 발생 △기타 방송업무와 관련한 각종 현안 등 폭넓은 주제를 다룰 수 있게 한 점도 특징이다.

사측이 공정방송과 관련한 요구를 해태할 수 없도록 정례화(본부별 편성위원회 매월 1회)하고, 3인 이상의 위원이 회의 개최를 요구할 시 임시 회의도 열도록 한 점, 편성위원회 회의 종료 후 결과를 관련자들에게 고지하고 사내 공개할 수 있게 한 점, 회의 안건에 대한 자료를 관련 부서와 당사자에게 요구할 수 있고, 필요할 시 회의 안건 관련자의 출석도 요구할 수 있게 한 점, 편성규약 위반 및 취재·제작 실무자의 자율성 침해에 대해 출석위원 과반수 찬성으로 시정 및 재발 방지를 촉구할 수 있는 점, 편성규약 위반 및 취재 및 제작 실무자 자율성을 심각하게 침해했을 시 출석위원 과반수 찬성으로 전체 편성위원회에 상정할 수 있는 점 등 편성위원회와 관련된 구체적인 사항을 ‘의무화’ 조항으로 정비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과거 ‘취재 및 제작의 자율성을 보장함으로써 방송의 공정성 및 공익성을 실현하고 국민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목적에 ‘내외의 부당한 간섭과 압력으로부터의 방송의 독립을 지킨다’는 내용이 추가돼 편성규약의 취지가 더 또렷해졌다. 이에 따라 취재 및 제작 책임자의 권한과 의무가 강화됐다.

취재 및 제작 책임자는 △실무자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여 창의적인 취재 및 제작 환경을 조성하고, 구체적인 취재 및 제작과정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방송의 적합성 판단 및 수정과 관련하여 실무자와 성실하게 협의하고 설명해야 한다 △실무자의 취재 및 제작내용이 자신의 의견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수정하거나 실무자에게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 된다 등 취재 및 제작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윗선 압력’을 최대한 방어하는 조항이 신설됐다.

취재 및 제작 실무자의 권리와 해명 요구 수준도 크게 신장됐다. 개정된 편성규약은 취재 및 제작 실무자에 대해 △자율성은 방송법이 정한 제반 기준 내에서 최대한 보장받고 △편성·보도·제작 상의 의사결정에 의견을 제시할 수 있고 그 결정과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권리를 가지며 △자신의 양심에 따라 자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며, 자신의 신념과 실체적 진실에 반하는 프로그램의 취재 및 제작을 강요받거나 은폐·삭제를 강요당할 경우 이를 거부할 권리가 있고 △취재·제작된 프로그램이 사전 협의 없이 수정되거나 취소될 경우 그 경위를 청문하고 해명을 요구할 수 있으며 △제작의 자율성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프로그램 관련 결정에 대해서 알 권리와 시정을 요구할 권리가 있고 △업무수행 과정에서 방송의 자유와 독립을 침해받거나 자율성을 저해하는 제반 문제가 발생할 경우 ‘편성위원회’에 조정과 해결을 요청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구색 맞추기 식’ 협의에서 ‘단협’ 위상 가진 합의로 발전

KBS는 최근 편성규약 개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고대영 사장은 취임 전부터 편성규약 개정 의사를 밝혀온 바 있다. ⓒ미디어스

개정을 통해 편성규약 내용이 진전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노사 양측의 성실한 ‘합의’가 있었다. KBS는 2000년 제정 과정을 두고 “KBS는 본 규약의 제정을 위해 사내외에 걸쳐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의견수렴과 조사활동을 벌였다”고 밝혔다. 2000년 7월 8일 편성규약 TF팀(모든 취재 및 제작부서를 포괄해 국장부터 일반 직원까지 15명으로 구성)을 꾸려 4차례 회의, 1차례 워크샵으로 편성규약 포함 내용을 정리하고 쟁점을 토론했고, 그 해 9월 27일부터 10월 15일까지 사내 게시판과 기타 경로를 통해 취재 및 제작 종사자들의 의견을 직접 수렴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내부의 반응은 달랐다. 2003년 개정 당시 노측 위원들은 TF팀을 구성해 깊이 있는 논의를 벌인 것은 사실이나, 사측이 편성위원회 구성을 위해서는 기존 단협 사안인 공방위 조항을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밀어붙이면서 원활한 논의가 막혀버렸고 2000년 12월에 편성규약이 일방 선포됐다는 입장이었다.

KBS 노사는 2003년 5월 21일, 기존 편성규약이 제작자율성을 보장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에 공감하고 ‘노사협의’를 거쳐 개정할 것에 합의했고, 같은 해 7월 3일 공방위 산하에 편성규약 개정 소위원회를 노사 동수(각 4인)로 구성해 개정안을 마련하는 데에 합의했다. 이후 4차례의 소위원회, 노사 4인 대표(편성본부장·보도본부장, 노조 보도·제작 부문 공추위 간사) 회의 등을 거쳐 확정됐다. 공방위에서 합의된 내용은 부사장과 노측 대표 부위원장의 서명이 포함된 ‘합의서’로 남았으며, 회의 때마다 회의록과 속기록으로 주요 내용이 기록되었다. 최종 합의안에는 정연주 사장과 김영삼 KBS노조위원장이 서명하면서 편성규약은 단협과 같은 위상을 지니게 됐다.

현재 고대영 사장은 13년 전보다 더 퇴보한 방식으로 편성규약을 고치려고 하는 모양새다. 노조나 제작 실무자를 배제한 채 초안이 만들어졌고 관련 내용도 비밀에 부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영 사장은 지난 23일부터 시행된 조직개편에서도 ‘밀실 진행’과 ‘일방 통보’ 기조를 밀어붙여 논란을 자초한 바 있다. 내부 구성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반영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결국 경영진의 권한에 속하는 조직개편과 달리, 편성규약 개정은 계속해서 취재 및 제작 실무자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조직개편 때와 마찬가지로 밀어붙이기 식의 태도를 고수한다면 노사 갈등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당장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본부장 성재호, 이하 새 노조)는 24일 낸 성명에서 “절대로 개정 협상은 없다”고 밝혔다. 새 노조는 내부적으로도 비밀리에 추진되고 있는 편성규약 개정 과정에 대해 문제제기한 후, △본부별 편성위원회 폐지 △사측 책임자를 임원→실·국장으로 격하 등 일부 ‘설’로 나오고 있는 개정 방향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특히 새 노조는 편성규약은 2003년 개정 당시 노사 양측의 서명 날인을 통해 ‘단체협약’과 같은 효력을 지니게 되어, 일방이 파기하거나 고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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