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돌아온 7주기가 지나갔다. 또 매년 그렇듯 봉하마을에선 추도식이 열렸다. 작년에는 정치적으로 날카로운 메시지를 던졌던 노건호 씨, 올해는 달랐다. 하지만 봉하마을은 그 순간 여전히 갈등의 한복판이었다. ‘친노’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당을 깨고 나간 국민의당 지도부에 비난을 퍼부었다. 이제 보수언론은 또 ‘친노’를 호명하며 비난 일색의 지면 편집을 선보일 태세다. 어쩌면 시작부터 끝까지가 매년 되풀이되는 레파토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지 의문이다.

우리의 정치는 이제 누가 잘했네 못했네만 따질 줄 알게 되었다. 이성과 합리로 토론할 수 있는 참을성을 다 잃어 버렸다. 안철수 공동대표와 박지원 원내대표에 반발하는 사람들을 ‘친노’로 규정하고 준엄하게 꾸짖는 건 쉽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비난을 자초할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한 배경이 무엇인지 그 맥락을 따져보려는 노력은 없다.

이 사회에서 어떤 사건의 원인과 맥락을 찾는 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 되었다. 남의 주장을 쉽게 선입견 속에 집어넣고 그 선입견의 논리에 따라 매도한다. 어느 특정 세력의 일이 아니다. 공론장은 무너졌고 담론의 체계는 와해됐다. 누가 누구의 편인지를 따지고 상대 주장의 ‘의도’를 추적하는 일이 남았다.

‘옛날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공론장을 형성하고 담론을 세우려고 노력하면서 바로 그 일이 필요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 순간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것은 묘하게도 진보정치의 성장과 노무현 대통령의 탄생이 겹쳐지던 때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인으로선 드물게 토론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안다. 그렇기 때문에 퇴임 이후 인터넷을 활용해 토론의 장을 만들어 보려고도 시도했던 것이다. 그를 좋아한 사람들은 합리와 이성에 대한 그의 믿음에 환호하였다. 그런 믿음이 절망이 된 것은 2009년 5월의 사건 때문이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7주기인 23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 각지에서 온 참배객들이 노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뉴스 화면을 보며 절망감을 느꼈다. 전직 대통령이 죽음을 택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전직 대통령마저도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자체가 이 공간을 지옥과 같은 것으로 느끼게 했다. 더 이상 이성과 합리에 기반 한 토론이 우리 정치에서 통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직관이 머리를 때렸다.

이명박 정권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괴롭힌(?) 이유는 주지하다시피 촛불시위 때문이다. 항간의 소문은 촛불시위의 배후를 따지기 위한 시나리오가 가동됐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영향력을 축소할 필요가 제기됐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양초는 도대체 누가 대고 있는 거냐고 따졌다는 얘긴 더 이상 비밀도 아니다. 이 ‘스토리’에는 세계에 대한 보수정권의 냉소적 인식이 그대로 담겨있다. 어찌됐건 간에 이런 식의 국민적 반발을 정치가 포섭할 기회를 찾는 게 아니라 힘으로 짓누르는 ‘공작’을 선택한 것은 체제에 대한 불신의 방점을 찍게 한 행위다.

바람직한 정치는 의도를 보더라도 명분으로 싸우는 것이다. 민주정치의 10년은 그런 풍토를 자리 잡게 만드는 과정이 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이제는 모두가 이 당시의 이명박 정권과 같은 선택을 한다. 인터넷을 배경으로 삼아 종횡무진 하는 이른바 ‘논객’들이야 원래 그랬다 치자. 언론이나 웬만한 공공기관도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에게 ‘불순한 의도’가 있다거나 ‘정치적’이라는 수사를 붙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 이후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요구하는 유가족들을 향해 집권여당의 원내수석부대표는 “외부세력이 가담한 정부전복, 반정부 투쟁”까지 입에 올렸다. 이제 공영방송인 MBC는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동행명령에도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현실은 어떤 의미에서 정치적 자유주의의 종말을 보여준다. 더 이상 서로의 ‘포지션’을 존중하는 것과 비판을 제기하는 것은 양립 불가능한 문제가 되었다. 이런 현실은 권력과 결탁한 언론이 앞장서서 재생산하고 있다. ‘종편’이란 괴물은 이 현실의 적나라한 반영이다.

이성과 합리라는 자유주의적 이상이 아니라 권력의 조작(manipulation)을 통한 도착적 냉소가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동안 주체들은 끝없는 박탈감의 소용돌이 속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우리는 오직 상대를 깎아내리는 걸로 ‘비판’을, 우격다짐과 끝나지 않는 말꼬리 잡기로는 ‘논리’를 대신하고 있다.

언론이나 지식인의 오류는 교정의 대상이 아닌 ‘자격’ 유무의 문제로 치환된다. “대통령이 왜 이렇게 밖에 말하지 못하느냐”라는 물음 속에는 ‘나도 그것 보다는 잘할 수 있는데’라는 자족적 규정이 숨어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이 대통령인데 ‘나’는 대통령이 아니므로, 그에게도 대통령의 자격은 없는 것이다. ‘대통령’의 자리에 기자나 교수를 넣어도 마찬가지의 논리가 성립한다.

이런 식의 박탈감이 만연하게 된 것은 체제가 우리를 경쟁으로 내몰고 이를 내면화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아이들은 유치원에 들어갈 때부터 남과 자신을 비교할 줄 알게 되었다. 초등학생들은 ‘휴거(휴먼시아 거지)’라는 말까지 사용한다. 중학생, 고등학생 정도가 되면 벌써 포기할 줄 알게 된다. 공부는 해서 무얼 하는가, 애초에 부잣집에 태어나 국제중 국제고 특목고 코스를 타지 못했는데.

이렇게 형성된 열등감은 체제와 기득권을 향하는 게 아니라 자신과 다른 존재기반 위에 있는 약자들을 향한다. 약자들을 괴롭히고 조롱하고 짓밟으면서 상대적 우위를 확인하고, 오직 소수의 강자들에게만 ‘개인’의 문제를 구실로 삼아 사라질 것을 겨우 요구한다.

세상 만물에 대한 ‘소비’는 주체의 박탈감을 극복하는 가장 흔한 방법 중 하나다. ‘비평’은 ‘상품평’으로 성격을 달리하게 되었다. 누군가 자신이 선택한 무언가를 비평할 때, 사람들은 상품에 대한 구매거부 선언이 이뤄진 것처럼 행동한다. 이 상품을 구입한 내가 바보인지를 묻고, 이 상품의 판매를 음해하는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시대의 종말을 체현하게 된 것은 정치가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이러한 소비의 대상으로 치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정치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잘 팔려야 하는 것으로 변질됐다. ‘정치용어’가 ‘마케팅용어’와 별다를 게 없는 시대가 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참여’를 말했다.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말했다. 이것은 정치의 소비자가 아니라 정치의 생산자가 되라는 메시지다. “새 시대의 맏형이 되고 싶었지만 구시대의 막내로 남았다”고 말한 것처럼 그는 뜻한 바를 모두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냉정히 따져 보았을 때 기대를 받은 만큼 통치를 잘 하지도 못했다. 그의 시대가 이어지는 동안 노동자 서민은 행복하지 못했다. 짤리고, 구속되고, 비정규직 되고, 죽었다.

그러나 적어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성과 합리를 통한 자유주의적 이상으로 시민이 정치의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가 당선된 비결은 기성 정치에 대한 냉소에 일부 있었으나 적어도 그는 오늘날의 권력자과 같은 냉소적 음모가는 아니었다. 만일 그가 살아서 ‘헬조선’이 돼버린 정치의 현실을 보았다면 무엇을 했을까 궁금하다. 최소한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았겠는가. 우리가 언론으로서 거기에 한 마디 비판을 보탤 수 있었다면, 참으로 보람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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