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가 <KBS 방송편성규약>(이하 편성규약) 개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00년 제정된 후 2003년 개정된 버전이 13년째 유지되고 있는데, 현재의 편성규약이 미흡한 만큼 공정성, 객관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를 개정하겠다는 것이 고대영 사장의 뜻이다. 회사가 만든 초안이 부사장에게 보고된 것으로 전해질 정도로 속도를 내는 상황에서, 정작 ‘취재 및 제작 종사자’의 의견을 들으려는 움직임이 없어 지난 조직개편 때와 같이 ‘비밀리 준비 후 강행 수순을 밟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고대영 사장은 지난해 사장 면접 때부터 KBS 방송편성규약 개정에 대한 뜻을 밝혀 왔다. (사진=KBS, 미디어스)

고대영 사장은 지난해 KBS 사장 면접에서부터 국회 청문회, 취임사 등 공개석상에서 편성규약 개정의 필요성을 거듭 밝혀 왔다. 하지만 개정을 추진하는 방식이 지난달 졸속 처리된 ‘조직개편’ 당시와 빼닮아 있다. 조직개편을 주도했던 혁신추진단은 내부 소수 인원만 내용을 숙지한 채 침묵을 지키다, 지난달 중순에야 처음으로 양대 노조에게 ‘논의’ 아닌 ‘설명’을 했다. 지나친 상업화 기조와 구성원 의견 수렴이 거의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내부의 반발이 컸지만, 회사의 안은 보름도 되지 않아 KBS이사회를 통과했고 시행을 앞두고 있다.

KBS는 현재 편성규약 개정 초안을 만들었고, 이 안은 이달 중순께 부사장에게 보고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노조나 제작 실무자의 의견을 반영하는 과정은 아직 없었다. KBS노동조합(위원장 이현진, 이하 KBS노조)과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본부장 성재호, 이하 새 노조), 현재 편성위원회 각 본부별 노측 위원들까지도 역시 사측으로부터 어떤 제안이나 언질을 듣지 못했다고 전했다.

편성규약 첫 개정이 이뤄진 2003년과는 매우 다른 상황이다. 당시 편성규약 개정 실무소위에서 노측 간사를 맡았던 권오훈 PD는 “(편성규약 개정을) 공방위 안건으로 올렸고, 공방위 산하에 실무소위를 구성해 석 달 정도 노사가 논의해 지금의 안을 만들었고, 사장과 노조위원장의 서명으로 확정을 했다. 노사가 같이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노사 대표 간의 각각의 의견을 받아 안건으로 만드는 과정을 거쳤고, 노사 대표로 정연주 당시 사장과 김영삼 KBS노조위원장이 편성규약 문안에 대해 합의하고 서명을 했다는 것이다. 노사의 서명 날인으로 편성규약은 ‘단체협약’과 같은 지위를 갖게 됐다. 이는 만약 단협을 개정하거나 폐기하려고 할 때 회사가 노조와 협의를 거치지 않을 경우 실정법을 위반하는 셈이 된다는 의미다.

성재호 새 노조 본부장은 “방송법에는 편성규약을 제정할 때 ‘취재 및 제작 종사자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나와 있다. 현재 보도위원회, TV위원회, 라디오위원회 등 각 본부별 편성위원회의 취재 제작 대표들이 있다. 결국 공방위에서 안건을 상정해야 하는데 안건을 올리겠다는 말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조직개편처럼 하루 이틀 전에 통보할 가능성도 있다. 편성규약은 하나의 ‘규약’이다. 기본적으로 상호 간의 약속을 말한다. 논의과정부터 협의를 해서 정하는 것이지 ‘회사 안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강행하겠다’는 자세로 나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며 “이렇게 비민주적이고 독선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공영방송 경영진이 할 일이 아니다”라고 전했다.

‘공정성’, ‘객관성’ 말하지만 ‘노조 배제’ 속내

사측이 추진하는 편성규약 개정안의 ‘내용’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2000년 제정안과 달리 보도와 프로그램에 대한 논의를 나눌 수 있는 편성위원회 구성을 보장하고, 취재 및 제작 실무자의 자율성을 보장한 현재의 안을 바꾸는 것이 과연 보도 공정성과 제작자율성을 신장하는 방향일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권오훈 PD는 “박권상 사장 시절인 2000년 제정된 편성규약은 대단히 유명무실한, ‘선언적’인 내용이었다. 2003년 개정 때 ‘양심에 반하는 지시를 받을 경우 제작하지 않을 권리’ 등 제작자율성을 보장하고, 편성위원회라는 제도적 장치를 만든다는 실질적 내용이 포함됐다”고 말했다.

개정된 편성규약 제6조(취재 및 제작 실무자의 자율성 보장)는 취재 및 제작 실무자에 대해 △자율성은 방송법이 정한 제반 기준 내에서 최대한 보장받고 △편성·보도·제작 상의 의사결정에 의견을 제시할 수 있고 그 결정과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권리를 가지며 △자신의 양심에 따라 자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며, 자신의 신념과 실체적 진실에 반하는 프로그램의 취재 및 제작을 강요받거나 은폐·삭제를 강요당할 경우 이를 거부할 권리가 있고 △취재·제작된 프로그램이 사전 협의 없이 수정되거나 취소될 경우 그 경위를 청문하고 해명을 요구할 수 있으며 △제작의 자율성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프로그램 관련 결정에 대해서 알 권리와 시정을 요구할 권리가 있고 △업무수행 과정에서 방송의 자유와 독립을 침해받거나 자율성을 저해하는 제반 문제가 발생할 경우 ‘편성위원회’에 조정과 해결을 요청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편성규약 전문 보기)

더구나 고대영 사장이 편성규약 개정을 언급하면서 공공연히 ‘노조 간섭 배제’를 주장해 온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지난해 11월 24일 취임사에서 편성규약 개정 이유로 “공정성, 객관성 문제 해결”을 들었지만 그보다 더 자주, ‘노조 간섭 배제’ 뜻을 밝혀 왔다.

사장 면접 당시 참석했던 이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편성규약 개정을 가장 강조한 후보가 바로 고대영 사장이었다. 그는 보도나 방송 프로그램에 대해 제작실무자와 사측이 논의하는 편성위원회에서 의견이 좁혀지지 않을 경우, 노사 단체협약에 규정되어 있는 공정방송위원회를 열도록 한 현재의 편성규약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국회 청문회 때 제출한 서면 답변에서도 “지금의 편성규약이 제3자인 노동조합의 개입을 가능케 하는 등 방송독립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 방송법 제4조 2항에는 ‘누구든지 방송편성에 관하여 이 법 또는 다른 법률에 의하지 않고는 어떠한 규제나 간섭도 할 수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누구든지’에는 노동조합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는 편성규약 개정의 목적을 가장 솔직하게 밝힌 발언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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