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길환영 전 KBS 사장의 보도개입을 폭로했던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의 정직무효 확인소송 결과가 나왔다. 재판부는 폭로 이후 김시곤 전 국장에게 내려진 정직 4개월이라는 징계는 그 사유가 인정된다고 보았지만, 그가 조목조목 밝힌 길환영 전 사장의 보도개입 사실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인정한 바 있다.

간절함마저 엿보였던 집요한 보도개입

2014년 5월 9일은 언론사에 기록될 만한 날이다. 국가기간방송사의 보도국장이 자신의 ‘곤란함’을 해명하기 위한 기자회견 자리에서 임명권자인 사장의 비위사실을 폭로하고 ‘사퇴’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당시 김시곤 전 국장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 수를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 수와 비교했고, 참사를 추모하기 위해 검은 옷을 입은 뉴스 앵커들에게 검은 옷을 입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논란 때문에 내부 구성원들의 사퇴 요구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권력의 눈치만을 보면서 사사건건 보도본부 보도국의 자율성을 침해한 길환영 KBS 사장은 즉각 자진 사퇴해야 한다”는, 훨씬 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김시곤 전 보도국장 비망록에 따르면 길환영 전 사장은 대통령 동정 소식을 톱으로 올릴 것을 자주 요구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2013년 1월 1일, 3월 7일, 5월 18일, 5월 5일 KBS <뉴스9> 톱 보도

이후, 김시곤 전 국장은 작심한 듯 길환영 사장이 KBS뉴스에 개입해 온 구체적인 사례를 KBS기자협회 총회와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밝혔다. 길환영 사장은 2013년 가장 뜨거운 감자 중 하나였던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과 관련해 순서를 뒤로 미루라고 하거나, 대통령 관련 뉴스는 뉴스 초반 20분 내로 소화하라고 하는 등 메인뉴스 <뉴스9> 보도 내용과 순서에 끊임없이 의견을 피력했다. 김시곤 전 국장은 대통령의 해외 방문 당시에는 관련 꼭지를 늘리라는 주문 때문에 “몸살을 앓았다”고까지 표현했다.

정직무효 확인소송 과정에서 김시곤 전 국장이 제출한 이른바 ‘비망록’에는 보다 자세한 사례가 꼼꼼히 기록돼 있다. 비망록에 따르면 길환영 사장은 2013년 8월 20일 <국정원 댓글작업 11개 파트 더 있다> 특종을 빼라거나, 2013년 5월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성추행 논란에 대해서도 순서를 뒤로 보내라고 했으며, 대통령 동정이나 발언을 톱(맨 처음 꼭지)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2012년 12월 보도국장으로 임명된 김시곤 보도국장은, 뉴스 편향성과 불공정성 논란 때문에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이하 새 노조)와 KBS기자협회 등 내부 구성원들로부터 비판 받아온 인물이다.

그가 보도국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KBS 보도에서는 크고 작은 논란이 이어졌다. ‘용산참사’란 말은 경찰 공권력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주고 가치중립적이지 않으므로 ‘용산사건’으로, 박근혜 정부의 공약파기 논란은 ‘공약수정’이라는 말로 대체하라고 주문하는가 하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아들 부정입학 특종에서도 ‘프라이버시’를 이유로 등수나 점수 등 구체적 사실 일부를 빼라고 지시해 리포트의 힘을 뺐다. 2013년 5월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성추행 소식을 전할 때는 태극기 배경이나 청와대 브리핑룸 영상을 사용하지 말라는 문건이 보도국 내에 게시됐고, 10월에는 반론권 보장도 않고 추가취재도 하지 않은 채 TV조선의 채동욱 전 검찰총장 혼외자 보도가 ‘중계방송’되는 일이 일어나 김시곤 전 국장의 사퇴 여론이 일어나기도 했다.

지금까지 드러난 상황만 보자면, 길환영 사장은 스스로 판단해 임명한 보도 책임자(보도국장)가 지휘하는 뉴스에 만족하지 못해 여러 가지 지시를 내린 셈이다. 길환영 사장의 많은 주문사항은 실제로 뉴스에 다수 반영됐다. (▷ 관련기사 : "길환영 보도개입" 김시곤 비망록 파문)

길환영 사장의 대통령 해바라기 행보는 ‘보도’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박근혜 정부 원년인 2013년, KBS는 봄 개편에서 <다큐극장>이란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개편 전부터 △기획 및 편성을 비밀리에 진행 △제작 실무진 의견 미반영 △내부 다큐국이 아닌 외주제작사의 제작 △전후 현대사 다수를 차지하는 ‘박정희 시대’ 미화 가능성 등으로 안팎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끝내 신설됐고, 23편의 아이템 중 <428km의 땀과 눈물, 경부고속도로>, <수출 100억불, 한강의 기적을 이루다>, <‘잘 살아보세, 새마을운동’>, <글뤽아우프! 독일로 간 경제 역군들> 등 12편이 박정희 시대를 다뤄 ‘미화’ 논란을 피해갈 수 없었다.

길환영 사장 시절에는 그간 방송에서 ‘친박’ 성향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던 시사평론가 고성국 씨를 중용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고성국 씨는 2013년 봄 개편 당시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로, 2014년 시사 프로그램 <시사진단> 진행자로 내정됐으나 내부 구성원들의 반발로 두 차례 다 무산됐다. 또한 장영주 전 CP는 KBS이사회가 길환영 전 사장의 해임제청안을 의결하기 하루 전인 2014년 6월 4일, 사내게시판에 글을 올려 KBS <TV쇼 진품명품> 파행과 KBS <추적60분>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 관련 소송 무마의 주역이 길 전 사장이라고 밝힌 바 있다. 또한 KBS <심야토론>에도 끊임없이 개입하려고 했다고 전했다.

2013년 방송된 KBS <다큐극장> 아이템 목록. 박정희 시대를 다룬 아이템은 파랗게 표시했다. (표=미디어스)

길환영 전 사장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애썼나

그러나 이 같은 길환영 사장의 ‘노고’는 법원의 잇따른 판결로 무색해지고 있다.

지난해 9월 3일, 서울행정법원 제2부(재판장 박연욱)는 길환영 전 사장이 제기한 해임무효소송에 대해, KBS이사회가 해임 근거로 든 △직무능력 상실 △세월호 오보 책임 △재정적자 등 3가지 해임사유 중 재정적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유가 타당하다며, 길 전 사장의 소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KBS 다수 구성원들이 직종, 직군, 직급을 불문하고 원고(길환영 전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보직사퇴하고 양대 노조가 공동 파업에 돌입해 KBS 내부 조직체계가 극심한 파행을 은 점 △KBS뉴스가 세월호 오보를 해 국가기간방송으로서의 신뢰가 훼손된 상태에서 뉴스 및 프로그램이 축소·대체되는 사태가 벌어져 공적 기능이 더 심각하게 훼손된 점 △사태의 직접적 원인은 원고가 공영방송 독립성·공정성·자율성을 침해했다는 의혹이 확산됐기 때문인데 일련의 사태에 대해 신속하고 적절하게 대응하고 수습하지 못한 점 △KBS 다수 구성원들로부터 신뢰를 잃고 조직관리능력에 문제를 드러냈으며 오히려 해임처분 이후 비로소 공사의 운영이 정상으로 회복된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결과, “길환영 사장은 KBS 사장으로서 공적책임을 실현해야 할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며 KBS이사회의 ‘해임제청안 가결’은 재량권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서울남부지법 제13민사부는 지난 29일, 김시곤 전 국장 정직무효 확인소송에서 길환영 전 사장의 보도개입이 ‘사실’로 인정할 만한 근거가 있다고 보았다. 재판부는 “길환영 사장이 업무총괄자(방송법 제51조 제1항)로서 9시 뉴스 큐시트를 받아볼 수는 있다”면서도 “KBS가 국가기간방송으로서 방송 공정성 및 공익성을 실현해야 하는 공적 책임을 지고 있고(방송법 제44조), 방송 자유와 독립을 구현하고 프로그램 공익성과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취재 및 자율성이 강화된 편성규을 제정하고 있으며, 취재 및 제작 책임자는 실무자의 취재 및 제작 내용이 자신의 의견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수정해서는 안 되므로(KBS 편성규약 제5조 제4항), 사장이라 하더라도 방송 공정성과 제작 자율성을 침해하는 어떤 시도와 행위도 용납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개입이 아니라 단순한 ‘의견 개진’이었다는 길환영 전 사장의 주장에 대해서는 “인사권을 가진 사람으로서 단순한 의견제시도 실질적으로 방송 취재 및 제작자들에게 강한 압박이나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어 결과적으로 방송 내용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지시대로 실제로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된 해경 비판 뉴스도 비판 정도가 상당 부분 완화돼 방송된 점 △대통령 관련 뉴스도 대부분 뉴스 러닝타임 20분 안에 배치된 점 등을 들어 “길환영 전 사장은 9시 뉴스에서 정부와 여당에 유리한 내용이 방영될 수 있도록 수시로 지시·개입함으로써 KBS 보도본부 독립성을 침해해 온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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