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언론계를 들썩이게 했던 ‘길환영 KBS 사장의 보도개입’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난달 29일 김시곤 전 보도국장의 징계무효 확인소송 결과가 나온 탓이다. 김시곤 전 국장은 당시 폭로로 정직 4개월의 중징계를 받아 소를 제기했으나 1심에서 패소했다. 재판부는 김시곤 전 국장이 길환영 전 사장의 부당한 개입에 대해 그동안 적극 저항하지 않다가 자신이 사퇴 압박을 받자 폭로한 것으로 보인다며 징계는 ‘무효하지 않다’고 판단했으나, 길환영 사장의 ‘보도개입’ 사실은 인정했다. 김시곤 전 국장이 재판 과정에서 제출한 이른바 ‘비망록’에 적힌 내용 상당수를 사실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길환영 전 KBS 사장과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 (사진=KBS, 미디어스)

지난 2014년 5월 9일, 김시곤 KBS 보도국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언론에 대한 어떠한 가치관과 식견도 없이 사사건건 보도본부의 독립성을 침해해 온 길환영 사장은 즉각 자진 사퇴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보도국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당시에도 KBS기자협회 긴급 총회 등을 통해 △대통령 아이템은 톱(맨 첫 뉴스)으로 △국정원 대선개입 보도 순서를 뒤로 △세월호 보도 당시 해경 비판 자제 등의 사례와 몇몇 의혹을 밝힌 바 있으나, 보도개입 사례를 직접 기술한 ‘비망록’ 전체 내용은 징계무효소송에서 드러났다. (▷ 관련기사 : 김시곤 보도국장 “사임한다. 길환영 사장도 사퇴하라” / 김시곤 전 보도국장, 청와대 KBS 개입 추가 폭로)

김시곤 국장이 작성한 비망록에는 2013년 1월 11일부터 11월 17일까지 KBS <뉴스9> 당초 편집안과 사장의 보도개입 사례 34건이 포함돼 있다. 비망록에 나타난 길환영 전 사장의 보도개입 방향은 분명했다. 정부(청와대, 대통령)와 여당을 부각하는 리포트는 앞으로 보내고 관련 보도량을 늘리되, 불리한 내용은 빼거나 순서를 뒤로 미루거나 양을 줄이는 방식이었다.

길환영 사장, 국정원 특종·윤창중 성추행 보도 등 다수 개입

비망록에 따르면 길환영 전 사장은 KBS 기자들이 단독보도한 특종에까지 손을 대려고 했다. 2013년 8월 20일 화요일 기록을 보면, 김시곤 전 국장은 KBS 법조팀 특종 <국정원 댓글작업 11개 파트 더 있다>와 정치부 기사 <경찰 CCTV 조작-왜곡 공방> 2건을 각각 6~7번째로 편집했으나, 추후 정치부 기사가 팩트와 달라 제작할 수 없게 되면서 국정원 댓글 특종만을 내보내려고 했다. 처음부터 두 건의 보도 모두 못마땅해 했던 길환영 전 사장은 국정원 댓글 특종만 나가게 된다고 하자 ‘둘 다 빼라’고 요구했으나, 김시곤 전 국장이 KBS 특종을 안 낼 경우 기자들을 통솔할 수 없다고 버텨 순서를 더 뒤로(6번째→14번째) 보낸 후에야 방송할 수 있었다.

방송 다음날에도 간섭은 이어졌다. 비망록에는 길환영 전 사장이 2013년 8월 21일 김시곤 전 국장을 포함해 보도국 주요 간부 몇몇을 불러 <국정원 댓글작업 11개 파트 더 있다> 방송이 적절하냐고 다그쳤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당시 법조팀장이 “팩트인 이상 어떻게 방송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하자, 길환영 전 사장은 팀장을 내보낸 자리에서 “똑바로 좀 해~ 어떻게 이런 게 나갈 수 있어?”라고 화를 냈다는 것이다. 또한 김시곤 전 국장은 ‘엘리베이터 내 TV화면 뉴스 속보 자막으로 해당 보도 내용이 계속 나가자 사장 비서와 안전관리실 직원이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디지털뉴스국에 직접 전화해 자막을 내보내지 말라고 요구했다’고 썼다. (▷ 관련기사 : "KBS 국정원 특종 은폐 의혹, 사장이 책임져야")

2013년 8월 20일 KBS <뉴스9> 보도

또한 비망록에는 2013년 5월 벌어진 윤창중 전 대변인의 성추행 논란에 대해서도 집요하게 뉴스에 간섭하는 길환영 전 사장의 태도가 적혀 있다. 2013년 5월 10일 김시곤 전 국장은 윤창중 워싱턴 성추문 사건 3건을 1~3번째로, 대통령 방미 속보 2건을 4~5번째로 편집했다. 길환영 사장은 대통령 방미 속보 2건을 1~2번째로 올리고 윤창중 사건 3건을 3~5번째로 다루라고 지시했으나 원 편집안대로 방송했다는 게 김시곤 전 국장의 설명이다.

2013년 5월 13일 기록에는 길환영 사장이 “내일부터는 윤창중 사건 속보를 1번째로 다루지 말라”고 지시했고, 이정현 정무수석도 전화해 대통령 방미 성과를 잘 다뤄달라고 주문했다는 내용이 나타나 있다. 2013년 5월 14일, 김시곤 전 국장은 윤창중 사건 속보 3건을 1~3번째로 편집했으나, 사장과 보도본부장 주문으로 실제 뉴스에서는 ‘정부, 북한에 대화 제의’ 및 ‘대화 제의 배경’ 2건이 각각 1~2번째로 나가고 윤창중 사건 속보는 3건에서 2건으로 줄여 3~4번째로 나갔다. 당시 MBC <뉴스데스크>와 SBS <8뉴스>는 윤창중 사건 속보를 각각 1~6번째, 1~5번째로 다뤘고 북한에 대화 제의를 했다는 내용 역시 각각 21번째, 18번째로 다뤄 KBS와 차이를 보였다. (▷ 관련기사 : ‘보도지침 논란’ KBS, 윤창중 덮으려 물타기까지?)

이밖에도 길환영 사장은 대통령의 동정이나 발언을 톱으로 옮기라는 지시를 자주 내렸다. 2013년 1월 11일(朴 당선인 “청년 글로벌 취업·창업 지원”), 2013년 3월 7일(朴 대통령 “믿고 도와달라…민생 대통령 될 것”), 2013년 5월 5일(박 대통령, 첫 해외 정상외교…오늘 방미), 2013년 5월 18일(박 대통령 “5·18 정신, 국민 통합으로 승화”)등이 대표적이다.

“길환영 사장, 재선임을 위해 KBS를 이용하는 사람”

김시곤 전 국장은 또한 길환영 사장이 KBS뉴스에서 기계적 중립을 포기하라는 주문을 했다고 밝혔다. 2013년 4월 10일 기록을 보면, 길환영 사장은 여의도 모처에서 사장 주재 보도본부 국장단 오찬을 열어 “우리 뉴스가 기계적 중립을 포기하고 과감하게 경향성을 드러내고 여론을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화섭 전 보도본부장이 기계적 중립은 KBS 공정성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며 반론을 제기했고, 김시곤 전 국장도 본부장 의견을 적극 지지해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오찬을 마쳤다고 써 있다.

비망록에는 길환영 사장에 대한 평가도 포함돼 있다. 김시곤 전 국장은 길환영 사장이 ‘KBS에 대한 시청자들의 신뢰나 공영방송의 역할과 사명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자신의 사장직 재선임을 위해 KBS를 이용하는 사람’이고, 박 대통령 최측근들을 가장 두려워한다고 바라봤다. 김시곤 전 국장은 ‘보도개입 폭로’ 기자회견 당일이었던 2014년 5월 9일 JTBC 인터뷰에서도 “길환영 사장은 대통령만 보고 가는 사람”이라며 “길 사장과 같은 언론관 가진 사람이 공영방송 사장을 해선 안 된다”고 비판한 바 있다.

김시곤 전 국장은 12일 미디어스와의 통화에서 비망록 작성 계기에 대해 “기록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썼다. 2014년 5월의 개입 사례는 기자협회 총회에서 밝혔다. 2013년 12월부터 4월까지가 비었는데 (개입이) 하도 매일 일상적으로 거듭되니까… 바쁘기도 했고 (기록하는 게)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길환영 사장은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고 부인하는 상황이다. 이에 김시곤 전 국장은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한 두 번 합니까. 그때 폭로했을 때(2014년 5월 9일)에도 시인한 게 하나도 없었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아 그렇게 (해임)된 것”이라고 답했다. 항소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항소 기한이 남아 있어) 검토 중이다. 만약 항소하게 되면 (판결에 대한 입장을) 법정에서 밝히겠다”고 전했다.

김시곤 전 보도국장 비망록에 따르면 길환영 전 사장은 대통령 동정 소식을 톱으로 올릴 것을 자주 요구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2013년 1월 1일, 3월 7일, 5월 18일, 5월 5일 KBS <뉴스9> 톱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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