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 1루수 린드로 인해 좌투수 선발 시에만 기회를 잡는 이대호는 타격감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 전날 경기에서 대타로 출전했지만 안타를 만들어내지 못한 이대호. 하지만 그는 내일 경기에서는 잘할 수 있다는 말을 했고, 그 말이 연타석 홈런으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이대호 외에는 알지 못했을 듯하다.

최악의 조건에서도 자신의 몫을 해내는 이대호의 존재감

김현수와 이대호는 열악한 환경에서 자신의 가치를 보여줘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대호는 시작부터가 힘겨웠다. 일본에 남았다면 엄청난 연봉에 최고 스타로 환영을 받으며 선수 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 슈퍼스타였다. 하지만 그는 그런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꿈이었던 메이저리그에 도전했다.

초청선수로 시범경기에 출전했고 쟁쟁한 경쟁자들과 대결에서 이겨내 힘들게 메이저리그에 입성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터운 벽이 존재하고 있었다. 밀워키에서 데려온 린드가 좌투수에게 극단적으로 약점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대호는 좌투수 전문 백업 요원으로 메이저를 시작했다.

이대호 (시애틀 AP=연합뉴스)

한국과 일본 프로야구에서 최고의 존재감을 보인 그가 메이저리그에서는 백업 선수여야 한다는 사실은 당혹스러웟다. 그렇다고 린드가 대단한 실력을 보여주고 있지도 않다. 다만 이대호보다 높은 몸값과 지난 시즌 20개의 홈런을 쳤다는 것이 그에게 주전의 가치를 부여했다.

2009 토론토 시절 35홈런 114타점으로 정점을 찍은 린드는 서서히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올 시즌 주전으로 23경기에 출전한 린든은 17안타, 1홈런, 5타점, 8득점, 0.230타율을 기록하고 있는 게 전부다. 장타율이 0.297로 3할도 안 되는 타자에 밀려 이대호가 주전 출전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답답할 정도다.

펠릭스가 선발로 나선 5일 경기에서 이대호는 션 머나야 등판으로 선발 출장했다. 벤치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은 선수들에게 주전 기회는 소중하다. 하지만 이런 절실함과 달리, 적응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타격감은 물론이거니와 1루 수비로 나와 동료들과 호흡을 맞추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대호에게는 이 모든 것이 부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이대호는 오늘 경기에서 왜 자신이 한일 프로야구를 평정한 최고의 타자였는지를 증명했다. 거대한 몸으로 인해 뛰지 못한다는 비난과 수비 실력도 형편없다는 혹평을 들어야 했던 이대호는 메이저 진출을 타진하며 살을 빼며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오늘 경기에서도 수비에서 큰 문제는 없었다. 4회 말 홈으로 들어오던 레딕을 잡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쉬웠다. 바로 홈 송구를 했다면 아웃을 잡아낼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송구 역시 타자의 반대편으로 오면서 아웃 카운트를 잡지 못하고 실점하는 장면은 아쉬웠다. 하지만 9회 수비에서는 앞선 주자를 2루에서 잡는 송구는 좋았다.

이대호 (시애틀 AP=연합뉴스)

급하게 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라인이 겹치며 송구에 어려움이 있기는 했지만 앞선 주자를 잡았다는 것은 중요했다. 1점차 상황에서 이 송구 하나는 모든 것을 뒤틀리게 할 수도 있는 수비였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이대호의 수비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좀 더 자주 출전하게 된다면 보다 능숙하고 익숙한 수비를 보여줄 수 있음을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3회 첫 타석에서 병살이 될 수도 있었던 2루 땅볼이 실책이 되며 시작된 이대호의 타격은 두 번째 타석에서도 큰 의미를 보이지 못했다. 잘 던지던 펠릭스가 팀이 5회 4득점을 하며 역전을 해주자 말 수비에서 급격하게 흔들리고 말았다. 5회 선두 타자 알렉스가 2루수 키를 넘기는 안타를 치며 시작되었다.

알렉스의 안타에 이어 세미엔의 빗맞은 타구가 안타가 되며 무사 1, 2루가 되었다. 최악은 이 상황에서 번스의 번트를 느긋하게 처리하던 펠릭스가 그마저 1루에서 살려주면서였다. 보다 빠르게 처리해야 했지만 주춤한 펠릭스로 인해 발 빠른 번스는 세이프가 되고 말았다.

무사 만루 상황에서 낮은 공을 적시타로 만든 로우리로 인해 점수 차는 1점으로 좁혀졌다. 레이든도프의 평범한 투수 땅볼은 충분하게 병살이 가능했다. 하지만 펠릭스가 더듬거리며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며 동점을 내주고 말았다. 여전히 무사인 상황에서 레딕의 3루 땅볼 역시 병살이 될 수도 있었지만 뒤를 빠트리며 2실점을 하는 상황은 최악이었다.

킹 펠릭스가 수비에서 결정적인 두 번의 실책을 범하며 위기가 고조되자 3루수 시거마저 결정적인 실책을 하며 경기를 내주는 듯했다. 5회에만 무려 6실점을 하며 4-2로 역전을 시키자마자 4-8로 재역전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분위기 반전에 나선 이가 바로 이대호였다.

실책이 쏟아지며 역전을 허용한 후 첫 이닝에서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경기의 승패를 가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했다. 이대호는 1사 상황에서 바뀐 투수를 상대로 초구 가운데에 몰린 공을 놓치지 않고 가운데 펜스를 넘기는 솔로 홈런을 만들어냈다. 최악의 상황으로 몰릴 수 있었던 시애틀은 이대호의 이 홈런 하나로 다시 추격을 시작했다.

마틴의 기습 번트 안타에 이은 도루 시도는 송구 실책으로 3루까지 이르게 했고, 아오키의 희생플라이로 점수는 6-8까지 추격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대호의 홈런은 침체된 팀을 깨웠고, 상대팀인 오클랜드를 흔드는 이유가 되었다. 이런 흐름을 놓치지 않은 이대호는 다음 타석인 7회 대단한 홈런을 쳐냈다.

이대호 [AFP=연합뉴스]

시애틀이 7회 공격에서 1점차까지 추격한 상황. 2사 2루 상태에서 이대호는 3B-1S 상황에서 안쪽 깊숙하게 들어온 공을 놓치지 않고 좌측 펜스를 넘기는 역전 투런 홈런을 만들어냈다. 전 타석에서는 가운데 담장을 넘기더니 몸 쪽 공을 놓치지 않고 역전을 만들어낸 이대호의 타격 기교는 최고였다.

이대호의 연타석 홈런은 시애틀이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경기를 역전으로 이끌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했다. 6회 홈런은 추격을 촉구하는 한 방이었고, 7회는 경기 자체를 뒤집어버린 홈런이었기 때문이다. 시애틀이 올 시즌 홈경기 첫 승리를 하게 한 이도 이대호였다. 끝내기 홈런으로 시애틀 홈에서 첫 승을 할 수 있게 했던 이대호는 힘들게 잡은 선발 기회를 놓치지 않고 팀이 오클랜드에 스윕할 수 있는 연타석 홈런으로 시위를 벌였다.

우투수가 나오면 경기 중에도 교체를 시도했던 서비스 감독이 최근에는 이대호를 교체하지 않고 있다. 오늘 경기도 두 개의 홈런이 모두 우투수를 상대로 한 것이라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경쟁자인 린드가 홈런 1개에 그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이대호를 벤치에 앉혀야만 하는지 의문이다.

경기를 마친 후 서비스 감독이 다시 한 번 이대호를 포옹하는 장면은 그래서 흥미롭다. 감독의 판단만이 아니라 복잡한 상황에서 선택해야만 하는 메이저리그 시스템에서 이대호가 이후 어떤 흐름을 이어갈지 아직 알 수는 없다. 연타석 홈런을 쳐도 다음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는 것이 메이저의 현실이니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김현수도 그렇지만 이대호 역시 꾸준한 출전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들이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을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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