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노동의 이중구속

가볍게 몇몇 풍문부터 말씀드리겠다. 어떤 출판사에서는 임금 체불을 밥 먹듯이 한다더라, 어디선 연장근로수당은 안 주면서 지각비나 지각사유서는 꼬박꼬박 받더라, 직원들에게 외부로 회사 이야기를 못 하도록 각서를 쓰게 했다더라, 육아휴직 쓰는 건 퇴사 수순이라고 하던데… 운운. 그동안 노조 활동을 하면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의 일부다. 물론 이런 풍문은 출판노동의 파편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풍문들은 자꾸만 흩어지고 사라지다가, 불현듯 폭로의 형상으로 노출된다. 자음과모음 투쟁을 시작하면서, 언론 제보라는 방식을 택하게 된 것 또한 그런 맥락이다. 하지만 내부고발자에 대한 일부 직원‧출판관계자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시선을 겪으면서, 나는 출판노동이 가진 어떤 고유한 병리적 현상이 존재하는 게 아니냐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첫 직장인 자음과모음에서 제일 힘들었던 건 인식적 판단중지의 상황을 지속적으로 경험했다는 것이다. 나는 매출이 높은 책을 만들어야 했지만 매일 넘쳐나는 일로 인해 그걸 기획할 업무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상사와 소통하는 적극적인 직원이 되어야 했지만 회사 게시판에 비판적인 댓글을 달았다가 모 부장으로부터 댓글을 수정하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이런 일은 수없이 다른 맥락 속에서 반복됐다. 나는 항상 무언가를 요구받음과 동시에 금지당했는데, 이런 불가해한 지시에 대해 ‘요령’이 생긴 선배들과 달리 초짜인 나는 우왕좌왕하거나 지나치게 성실했던 것이다. 결국 출판편집자로서 나는 어떠한 권리도 없이 책임만이 주어져 있는 ‘답정너’의 상태, 즉 직업적 임포텐스의 상태가 되었다(내가 고자라니!). 그건 야근이나 끝없이 계속되는 노동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흔히 이런 상태를 이중구속(double bind)이라고 부른다. 누군가 둘 이상의 모순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그 모순에 응답할 수 없는 상태. 이는 앞서의 풍문들이 발화되지 못하는 상황과도 정확히 겹친다. 각각의 풍문들은 이러한 이중구속에서 풀려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대나무 숲의 메아리 같은 거니까.

이런 와중에 ‘출판의 미래’를 예견하는 사람들은, 책을 만들어내는 이들에게는 기획력과 업무능력을, 책을 읽는 이들에게는 독서문화와 교양인의 태도를 요구한다. 이러한 미래적 요구의 확산은 출판노동자나 독자에게 일종의 윤리이자 정언명령으로 작용한다(“독자가 진정 원하는 것을 찾아라!” 혹은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그래서 언제나 출판노동자의 노동조건 이전에, 판매를 위한 야매 출판노동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대학교 추천도서’, ‘아무개의 서재’ 등을 통해 독자들에게 ‘읽어야만 하는’ 문화적 이데올로기로 주입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하나 묻고 싶다. 숭고한 출판의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출판노동에 만연한 부당함에 침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앞서 언급된 풍문에 더해 지적하자면, 문제는 그 풍문을 폭로하는 일, 다시 말해 책의 판권면에 기록된 이름들이 겪는 부당함을 더 이상 개인화하지 말아야 한다고 선언하는 일은, 언제나 출판 산업의 미래와 관계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미래의 출판을 긍정하는 행위는 현재의 출판노동자에게 기만과 위선을 가져다줄 뿐이다. 이런 불행의 씨앗들 속에서 저열한 낭만을 물신화하고 있는 출판노동의 미래가 밝을 리 만무하다. 출판노동의 이중구속에 사로잡힌 이들로 가득한 미래는 출판노동자와 독자 모두에게 디스토피아일 것이다. 좀 더 거칠게 말해볼까? 공장식 축산에 반대하고 건강한 삶을 위해 ‘채식주의자’가 되는 일과, 부당노동행위로 얼룩진 출판노동에 반대하고 건강한 (독서)문화를 위해 ‘반독서주의자’가 되는 일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가. 내가 볼 때 병치된 두 입장에는 차이가 없다.

JUAN MUÑOZ, , HangarBicocca, 2015. (출처: www.chiaroscuromagazine.com)

내-일을 위한 포이에시스

책이라는 매체를 바라보는 방식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이제 새로운 은하계들과 충돌하고 있다. 체코 출신의 디지털 사상가인 빌렘 플루서는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이 ‘추상게임’의 과정으로 진행되어 왔다고 본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상(像)처럼 “시간이 없는 조각의 세계”(3차원)에서 라스코 벽화와 같이 “깊이가 없는 그림의 세계”(2차원)로, 나아가 문자 문화를 통해 “평면이 없는 텍스트의 세계”(1차원)로 표현되던 의미의 조각들은 컴퓨터 이미지를 통해 “차원이 없는 양자(量子)의 세계”(0차원)로의 추상화 단계를 거쳐 온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이제 종이의 감각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면서 가상(피상)의 공간에서 ‘콘텐츠’를 소비하길 원한다. 추상화‧메타화된 세계(스크린)를 통해 텍스트와 영상 혹은 상상된 것들이 함께 재현된다. 플루서는 마르크스가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시켜야 한다’고 한 것을 발판삼아 컴퓨터 앞의 예술가들이 새로운 세계를 기획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이때 중요한 문제는 더 이상 노동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안적인 세계를 제작/창조(포이에시스)하는 것이다.”**

이렇듯 활자의 세계가 많은 모순들과 함께 삐걱거리며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 세계의 모순과 함께하는 장치는 계속 변하고 있다. 책이라는 장치(매체)를 다루는 노동이 반독서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지리멸렬한 모순에 갇혀 있다면, 우리는 이제 그 노동을 응시하는 ‘장치들’을 새로 기획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그런 기획의 제스처는 내게 이런 것이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2014)>은, 갑작스레 해고당한 산드라가 복직을 위해 다른 동료들을 설득하며 겪는 두 번의 낮과 한 번의 밤에 관한 이야기다. 산드라는 본인들의 보너스와 산드라의 복직을 두고 갈등하는 동료들을 직접 만나며 우울과 환희를 동시에 경험한다. 애초에 동료의 복직과 자신의 보너스라는 양자택일의 구조는 회사(라는 자본제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지만, 산드라의 설득과 투쟁으로 인해 이 문제는 그러한 차원—당연히 직원들은 ‘행복=보너스=돈’을 선택할 것이라는 회사의 인식, 즉 출판계에 빗대자면 출판노동의 이중구속을 영구화하는 위선적 구조—을 넘어서는 추상화된 레이어—그런 인식의 구조를 붕괴시키는 추체험된 (메타)인식—와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므로 만약 노동자 개인이 투쟁을 통해 만들어내는 새로운 장치가 있다면 이런 것이다: 구체적이고 지리멸렬했던 노동의 경험을, 메타화되고 유연해진 나의 (상상적) 인식과 경험으로 다시(re) 구체화해서 바라보게(view) 되는 것. 이런 새로운 장치의 생성은 개인뿐만 아니라 노동자 일반을 함께 준동하게 한다.

플루서가 ‘주어진’ 세계가 아니라 (그런 세계를 붕괴시키고 다시 점의 세계로부터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는) ‘상상된(피상적)’ 세계의 물질성을 예찬하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물신화된(전시되는) 책에 끈질기게 대항하면서, 행복한 삶의 장치로서의 책과 노동을 엮어내기 위한 점근법적인 연대가 요청된다. 이러한 조직화의 형태는 만들어진 이론이나 미래의 현실 대입이 아니라, 후에 이론이 될 구체적 현실의 총합을 버텨내는, 일상적 이미지로부터 포착된 푼크툼의 경험이다. 결국 내 일(노동)이 내일(미래)을 위한 시간을 꿰어내고 포획하는 것은 요밀한 포이에시스를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한 조건이 될 것이다. 더불어 제언하자면, 출판(노동)에 있어 미래란 시간적 순서로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내부에 잠재해 있으면서 스스로를 괴사시킬 수도, 개선시킬 수도 있는 맹장/부록(appendix)이 아닐는지.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중 한 장면

짧은 보론

어떤 투쟁의 끝은 우울이다. 계속되는 우울은 때로 날선 현기증을 동반한다. 이때 온통 어지러워진 세계를 똑바로 걸어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른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반응하는 다른 누군가다. 나는 침묵하지 않고 끊임없이 발화하고 응답하는 자들이 좀 더 늘어나기를 바란다. 이 같은 목소리와 응답의 엮임 속에서, (운명을 이미 파악한 후의) 시지프처럼 ‘지속하는 자들’ 말이다.

출판노동의 초짜인 내가, 부족한 경험과 개인적인 사건을 통해 출판계의 단면을 드러내려 한 것은 무모한 시도였을 것이다. 다만 이 무모한 시도를 통해, 모호하게만 인식되던 ‘출판’이 아니라 ‘출판노동’이라는 장소를 약간이나마 진동하게 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싶다. 짧은 글이 긴 여운을 남기기를 무작정 기대하면서, 모든 출판노동자들의 건투를 빈다.

<인용 출처>

* 빌렘 플루서, 『피상성 예찬 - 매체 현상학을 위하여』, 김성재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4, p.14.
** 같은 책, p.284. 여기서 플루서가 의미하는 것은 노동을 둘러싼 권력구조를 분석함으로써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을 일견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그가 의미하는 노동은 주어진 세계로부터 파생되는 노동이 아닌,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제작/창조하는 기술적 상상력에서 비롯되는 노동에 가깝다. 이러한 가상적 세계의 기술적 노동(예컨대 소설을 쓰는 기계)이 세계에 대항하고, 때로는 유희하고,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느냐의 문제는 필자가 보기에 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윤정기/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 출판지부 조합원

필자는 다섯 번의 연재를 통해 새내기 노동자로서의 자신에 관한 일종의 자기-분석을 감행하려고 한다. 이는 지리멸렬하고 극도로 주관적인 감상일 뿐이겠지만, 정확하게 소진되기 위한 몸부림이다. 다시 말해 이 몸부림은 일터에서의 과잉 소진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찌질한 노력의 일환이다. 독자들의 드넓은 양해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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