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국경 없는 기자회가 발표한 언론자유지수 순위에서 한국의 언론자유지수는 전체 180개국 중 70위를 차지했다. 중간 이상이니 꽤 언론의 자유가 있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노파심에 노무현 정부 때의 순위와 비교하자면 당시는 31위였다. 사실은 그조차 만족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분명한 것은 70위란 순위는 역대 최저치라는 사실이다.

국경 없는 기자회가 발표한 <2016 세계 언론자유지수>. 색이 어두울수록 언론자유가 보장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는 주황색이다. (사진=국경 없는 기자회 홈페이지 캡처)

그런데 그보다 충격적인 것은 이런 보도에 반응하는 한국 국민의 태도다. 별스럽지 않다는 분위기다. 심지어 대전 MBC 이진숙 사장은 ‘한국 언론은 정부로부터 자유롭다’는 말까지 할 정도다. 과연 언론자유 70위의 나라에서 나올 법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정부에 대해서 비판할 의도와 의지가 없는데, 자유롭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언론만 탓할 일은 아니다. 그 핵심을 5월 2일 JTBC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에서 따갑게 지적했다. 며칠 전의 일이었다. 언론의 정체성을 개에 비유해서 워치독, 랩독, 가드독 등으로 나눈 설명이었는데 거기에 사족이 붙었다. (말이 사족이지 앵커 브리핑 애청자들은 안다. 사족이 곧 핵심인 것을) 바로 슬리핑독에 대한 일침이었다. 매우 중요한 이슈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눈을 감고 있는 언론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었다.

JTBC 뉴스룸 5월2일 [앵커브리핑] '이 또한 지나가리라?' (뉴스 화면 캡쳐)

그리고 며칠이 흘렀고,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대한 집중보도가 있었던 5월 2일, 손석희는 앵커브리핑을 통해 이번에는 정부나 언론이 아닌 한국 국민을 향한 쓴소리를 전했다. 손석희는 먼저 일본 한 기업의 예를 들었다. 일본의 유키지루시라는 회사에는 두 번의 이슈가 있었다. 모두 해당 회사의 유제품을 먹고 식중독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처음의 사건은 1955년에 일어났으나 회사는 즉각 사과하고 식품 전량을 회수하는 등 신속한 대응을 보였다. 그리고 회사는 무사했다. 그러나 두 번째 사건인 2000년의 유키지루시의 태도는 과거와 달랐다. 지금까지의 가습기 살균제를 판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모르쇠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결국 유키지루시는 소비자의 대대적인 불매운동과 함께 악재가 겹쳐 파산했다고 한다.

5월 2일 옥시가 기자들을 모아놓고 사과를 하는 제스추어를 취했다. 그러나 옥시의 사과에는 진정성이 비치지 않는다. 그간 옥시 임직원들은 단체로 해외여행을 다녀왔고, 제품의 문제를 황사와 미세먼지 탓으로 둔갑시키기도 했다. 게다가 지난 주말 대형마트를 통해서는 전제품 1+1 판촉행사까지 벌였다. 이는 약사들까지 동참한 불매운동에 대한 정면 도전이자 피해자와 소비자를 우롱하는 태도라고 볼 수밖에 없다.

JTBC 뉴스룸 5월2일 [앵커브리핑] '이 또한 지나가리라?' (뉴스 화면 캡쳐)

그러나 옥시가 이런 태도를 취한 배경에는 한국의 메마른 현실이 도사리고 있다. 손석희는 “아주 냉정하게 살펴보면, 우리에겐 불매운동에 관한 한 성공의 기억이 없습니다. 갑의 횡포와 경영권 분쟁의 사나운 꼴을 보인 롯데는 불매운동에도 불구하고 그 불매운동 기간 중에 롯데마트 매출이 오히려 4퍼센트 증가했고, 역시 갑질 논란이 있었던 남양유업도 한 분기만 적자였을 뿐 결국은 매출이 증가했습니다”라고 했다.

이어 “우리는 빨리 잊거나, 혹은 빨리 잊고 싶어 하는 걸까요? 그리고 기업들은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걸까요?”라고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했다. “우리가 2000년의 유키지루시의 소비자가 되지 않는 이상 옥시 역시 1955년의 유키지루시가 되진 않을 겁니다”라며 앵커브리핑을 마쳤다.

며칠 전 언론을 비판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부끄러움에 어디라도 숨고만 싶었다. 옥시를 포함해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사망자가 239명에 달한다고 한다. 게다가 이 숫자는 끝난 것이 아니라 진행 중이라고 한다. 거의 세월호 참사 희생자 숫자에 근접한다. 어떻게 이런 대형참사가 계속해서 벌어질 수 있을까? 정부와 기업을 비난하기 전에 그런 이슈에 대해 아무 것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잠든 시민의식을 탓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슈가 발생해도 그냥 눈을 감는 언론이 슬리핑 독이라면, 내가 당한 재난이 아니면 외면하고 그저 빨리 잊기를 바라는 우리들은 과연 무엇일까?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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