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 기사 보셨나요?” SK의 CJ헬로비전 인수합병 성공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인 요즘, 저는 지난달 이런 연락을 받았습니다. 3월 15일 MBN은 “SK텔레콤의 CJ헬로비전 인수합병 건에 대한 공정위의 조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며 공정위가 해당 건에 대해 경쟁제한성이 있다고 판단했지만 시정조치를 내리는 선에서 인수합병을 허용하겠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고 ‘단독보도’ 했습니다. 이 리포트에는 공정위 고위관계자의 멘트가 포함돼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업계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러나 공정위가 공식 부인했고, MBN은 이유를 밝히지 않고 이 리포트를 내렸습니다. 다행히 구글 검색결과에 ‘저장된 페이지’가 남아 있어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잊힐 권리’에 대한 기사인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고요? 일단 방송통신위원회(위원장 최성준)가 만들려는 ‘인터넷 자기게시물 접근배제요청권 가이드라인’, 일명 ‘잊힐 권리’(the right to be forgotten)의 내용을 소개해야 합니다. 방통위가 3월 25일 공개한 가이드라인(안)의 핵심은 온라인 게시판에 글을 쓴 이용자 본인(사자의 경우 대행인)이 자신이 쓴 글을 삭제하려 할 때, 모든 사업자가 이를 협조하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유럽에서 논의 중인 수준에 비해 ‘이용자 본인’에 한정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범위가 아주 좁지만 어찌됐든 필요한 권리이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지금 우리 정부가 만들려는 잊힐 권리는 ‘내가 쓴 글을 내가 지울 수 있는 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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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접근배제 예외기준’인데요, 게시판 관리자 및 검색서비스 사업자가 요청인의 접근배제요청을 거부할 수 있는 조건을 정합니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접근배제를 요청받은 게시물이 다른 법률 또는 법령에서 위임한 명령 등에 따라 접근차단 또는 삭제가 금지되어 게시판 관리자 등이 해당 게시물의 보존의무를 부담하는 경우 △접근배제를 요청받은 게시물이 공익과 상당한 관련성이 있는 경우 등 두 가지입니다. 후자의 경우, “정무직 공무원 등 공직자, 기자 등 언론기관 관계인 및 이에 준하는 공인이 그 업무에 관하여 작성한 게시물로서 공적 관심사에 해당하는 경우” 게시판 관리자와 검색서비스 사업자가 접근배제요청을 거부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정부가 국민의 알권리를 강화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응이 왜 시큰둥하냐고요? 한국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잊힐 권리’가 이미 충분히 보장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에 대한 폭로 기사와 게시글, 중요한 정보가 담긴 기사와 게시글이 ‘임시조치’라는 제도로 순식간에 사라지고 있습니다. 가이드라인안에 있는 ‘접근배제 예외기준’은 이미 포털사이트가 적용하는 기준입니다. 공인에 대해서라도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가 있는 이상한 나라에서 가이드라인이 적용되면 이제 ‘진실의 한 조각’이 담긴 모든 글이 온라인에서 사라질 수 있습니다. 완벽한 증거인멸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방통위는 ‘국내에서 한국어 서비스를 제공하는 해외 사업자’까지 포함한다고 합니다. 방통위는 현재 ‘구글’과 협의 중입니다.

언론 기사와 장난질이 마지막까지 남는 구글에서까지 잊힐 권리가 적용된 검색결과가 나온다면, 진실을 취재하길 원하는 기자인 저는 온라인 어디에서도 ‘의혹’과 ‘진실’을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구글 검색봇(bot)은 이용자들의 방문이 급증한 곳의 정보를 수집해서 검색결과로 내놓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기사나 게시판 글이 삭제됐더라도 검색봇이 이를 업데이트하기 전까지는 ‘캐시’(cache, 저장소 또는 은닉처라는 뜻)가 남아 있습니다. 구글 쪽에 물어보니 “언론사에서 ‘캐시를 빨리 삭제해 달라’는 연락을 자주 해온다”고 합니다. 물론 누구나 구글 계정으로 로그인해 구글에 삭제된 기사의 URL(Uniform Resource Locator)를 보내면 하루 정도 뒤에 구글은 캐시를 삭제합니다만, 언론사가 구글에 전화를 걸어 독촉하는 이유는 권력과 광고주 때문이겠죠. 만약 구글코리아가 ‘잊힐 권리’ 가이드라인에 협조하면 이 삭제시간은 더 빨라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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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방통위는 가이드라인의 내용을 조금 더 숙고하기로 했습니다. 김재홍 방통위 부위원장은 11일 방통위 전체회의에서 권력과 기업의 압력으로 게시글이 삭제될 경우를 우려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글을 써서 공개됐으면, 글이 공론의 장에 나왔으면 온전히 개인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사회의 공유물입니다. 개인의 권리 대상에서 벗어나는 것인지 아닌지 검토해봐야 합니다.” 맞습니다. 자꾸 ‘나를 잊어 달라’고 하는데 감시를 어떻게 할까요? 권력은 어떻게 감시하고, 언론은 어떻게 감시할 수 있을까요? 저는 ‘잊힐 권리’를 옹호하고,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것을 환영합니다만 웹에서 모든 글과 증언을 사라지면 감시는 더 어려워진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권력과 기업, 공인이 잊고 싶어하는 것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진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안합니다. 정부, 사업자, 언론은 ‘잊힐 권리’만큼 ‘기억할 의무’도 제도화해야 합니다. 포털이 정정‧반론‧추후 보도 기사를 모아서 공개하는 것처럼 말이죠. 최소한 검색서비스 사업자는 ‘접근배제 예외기준’에 따라 접근배제 요청을 거부한 게시글과 언론 기사, 그리고 요청인에 대한 정보를 공개해야 합니다. 요청을 받아들이더라도 공인의 경우에 그 명단을 공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누가 어떤 정보를 웹에서 지우려고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언론도 URL을 통째로 삭제하는 게 아니라, 그 URL에 삭제의 이유를 밝혀야 합니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습니까? 기사를 삭제한 이유를 밝히는 게 독자에 대한 예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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