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곧이듣지 않는데 위원장님이라고 별 도리가 있겠습니까. 의심하는 게 언론의 일입니다. 사심 없이, 청와대 지시 없이, 법에 근거해서, 그것도 야당 추천 상임위원들을 설득해서 합의를 이끌어내려고 하는데 사정도 제대로 모르는 일부 언론들이 계속 딴죽을 걸어서 위원장님은 아마도 짜증이 났을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7일 최성준 위원장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측은지심’이 생겼습니다.

사실 저는 위원장님에게 쓴소리를 주로 하는 기자입니다만 위원장님을 ‘믿는’ 편입니다. 위원장님이 방통위에 입성한 배경에 전두환‧노태우 정권 시절 대법원장을 지내고 경희학원 이사장(2007.10~2015.10, 현 명예이사장)을 지낸 장인어른 김용철씨가 있다는 이야기가 들렸을 때도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부터 했습니다. 위원장님이 과거 한겨레에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했던 판사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전교조 명단 공개를 허용했던 판사라는 사실을 보도할 때에는 ‘어디선가 강한 압박을 받았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방통위를 출입하면서 더 믿게 됐습니다. 위원장님은 항상 토론과 합의를 중요하게 생각하죠. 겉과 속이 다르다고 비난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심지어 위원장님이 종합편성채널의 특혜를 유지하는 정책을 강행하고, 방송사의 공정성을 평가해 벌점을 2배 때리는 방송평가 규칙을 다수결로 개정하고, 불법해고와 방송통제를 자백한 MBC 임원의 녹취록에 가만히 있을 때에도 내심 위원장님을 믿었습니다. 위원장님을 강하게 비판하는 기사를 쓰면서도 속으로는 ‘이럴 분이 아니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했습니다.

저는 위원장님이 굉장히 합리적인 분이라 생각합니다. 상임위원 다섯 중 가장 열심히 공부하고 고민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도 자주 듣습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7일 위원장님은 “임기가 끝나기 전에 중장기 방송정책의 틀을 마련하고 싶다”고 하셨죠. 그리고 방송의 공공성, 공익성, 지역성을 수차례 강조하셨죠. 이 대목에서 갑자기 측은지심이 들었습니다. 왜냐고요?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이 위원장님에게 보고한 ‘초안’을 살펴봤기 때문입니다. 연구원 제안대로 정책을 짠다면 방통위는 사실상 간판을 떼야 합니다.

2월 25일 방통위 주최, KISDI 주관으로 열린 ‘중장기 방송정책 마련을 위한 워크숍’에는 위원장님의 평소 철학과 맞지 않는 정책제안이 나왔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겁니다. △지상파, 종편, 보도전문채널 등 방송영역에 최대주주 및 대기업의 소유규제 완화 △지역지상파 간 소유규제 완화로 지역방송 광역화 추진 △수신료 징수 기기를 스마트폰 태블릿 노트북으로 확대 △지상파 중간광고 점진적 허용 △방송광고 규제 대폭 완화…. 참, 위원장님이 7일 광고 규제를 계속 완화하겠다고 했으니 두 가지는 제외해야겠군요.

위원장님에게 꼭 묻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까 위원장님께 이렇게 물어봤죠. “KISDI에서 중장기 방송정책으로 대기업의 방송사 소유규제 완화, 지역지상파방송사의 상호 소유규제 완화를 제안했던데, 이런 건 위원장님의 평소 말씀과는 배치되는 것 아닌가요? 위원장님이 화가 나셨을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위원장님은 “우리가 방침을 정한 것은 없습니다. 그쪽에 연구용역을 줬고 그쪽 전문연구원들이 한 것이죠. 연구용역 결과가 오면 그걸 위원회에서 검토하고 상의해야죠”라고 말했습니다.

▲최성준 방통위원장이 7일 취임 2년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간담회는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에 위치한 한 한정식집에서 진행됐다. 객단가는 1만8천원이었다(주류 제외). 간담회에는 방통위 직원을 포함해 90여명이 참석했다. (사진=방송통신위원회. 사진을 누르면 간담회 모습을 담은 또 다른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장담컨대, KISDI가 제안한 정책들은 절대 위원장님 임기 내에 논의할 수 없습니다. 아마 시작조차 못할 겁니다. 수신료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또 지역지상파를 통폐합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또 대기업에게 보도권력을 넘겨주고, 자본의 방송 지배력을 강화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엄청난 문제입니다. 제가 굳이 위원장님께 “KISDI에 화나지 않았나”라고 물어본 이유는 평소 위원장님이라면 남한강 워크숍 자리 현장에서 불같이 화를 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용역을 미래부에서 받은 거냐, 방통위에서 받은 것이냐”고 핀잔을 줬어야 합니다.

만약 방통위가 KISDI의 제안을 바탕으로 중장기 방송정책을 논의한다면, 저는 또 죽어라 비판기사를 써야 할 것 같습니다. KISDI의 제안이 미디어생태계의 공공성을 끌어올리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방송광고 매출이 줄고 시청자들이 VOD로 넘어가는 와중에 방송광고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것도 시대착오적이고, KISDI가 제안하는 정책들은 공공성 공익성 지역성을 훼손하는 겁니다.

위원장님, 제가 너무 올드(old)한가요? 너무 공공성만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매체비평지에 다니다보니, 따지는 게 습관이 됐습니다. 그래도 없는 형편에 여기저기 자문을 구하고, 사업자들을 만나고,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만납니다. SK의 CJ헬로비전 인수합병 건에 대해서도 그렇게 기사를 씁니다. 심사를 준비하는 미래부의 어떤 직원은 “박 기자님이 기사로 쓰신 것들을 최대한 녹여냈다”고 했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다시 힘이 납니다. 그런데 방통위에서 제가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저와 비슷하게 ‘공공성’을 이야기하는 다른 기자들도 그럴 겁니다.

이제 일 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위원장님이 전임 위원장들과 다르게 ‘성과’를 남기면 좋겠습니다. 공공성을 조금이라도 붙들면서 정책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위원장님이 법 ‘해석’에 갇히지 않고, 방통위가 좀더 폭넓게 움직이면 좋겠습니다. 일 년 남은 3기 방통위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VOD 가격과 광고에 대한 틀을 잡고, 개인정보에 대한 권리를 강화하고, 방송통신융합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공적 의무를 설계하는 것입니다.

남은 일 년 동안 할 수 있는 일 중 아주 작게는 개인정보 보호를 강화하는 것도 있습니다. 아직 개인 최성준으로 이동통신사에 ‘통신자료 제공 요청 현황’을 조회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꼭 해보시길 바랍니다. 방통위에서 통신비를 지원받는 법인폰이라면 위원장님은 자신이 내사·수사의 대상이 됐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습니다. 방통위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동통신사들도 방통위가 해결할 문제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민원 몇 가지. 첫째, 기자간담회를 굳이 한정식집에서 하지 않아도 됩니다. 공기 좋은 청계산 자락에서 맛있는 음식과 술을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낮 2시 청사 4층에서 2~3시간 밀도 있게 진행하는 게 정책홍보와 검증에 더 좋습니다. 오늘만 해도 객단가 1만8천원짜리였는데 150만원 이상의 세금을 낭비했습니다. 둘째, 방통위를 청소하는 노동자들이 쉬는 곳은 청사에서 유일하게 햇빛이 들지 않은 곳인데 바꿔주시면 어떨까요. 마지막 셋째, 청사에 단기간 머무르며 일하는 노동자들이 상주인원과 똑같이 밥값을 500원 할인받을 수 있도록 힘을 써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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