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밖에서 잠이 들었다. 술꾼의 아내라면 심심찮게 겪는 일이다. 그런데 그곳이 술집도 아니고 길거리도 아닌 전처의 집이었다. 그것도 전처가 전화를 받아 그 사실을 알려왔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술이 원수라고 그냥 넘길 일은 아니었다. 아내는 제정신을 찾기 힘들 정도로 정신적인 충격을 받는다. 남편이 전처의 집에서 잠들었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전처가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알린 것에 더 예민해지기도 한다.

tvN 드라마 <기억>은 좀처럼 볼 수 없는 고도의 심리적 갈등을 그린 장면을 선보였다. 한 남자들 두고 두 여자가 다투는 것은 아닌데 왠지 그런 것이 아닐 수 없는 묘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연기하는 두 명의 중견 연기자 김지수, 박진희의 노련하고 깊은 연기가 있었다. 그 상황은 마치 복선인 듯 아닌 듯 미묘한 잔향을 남겨 더욱 감칠맛이 났다.

tvN 10주년 특별기획 금토드라마 <기억>

우선 이성민이 전처인 박진희의 집을 찾아가 죽은 아들의 침대에서 잠이 든 것이 김지수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취중이라 할지라도, 아니 취중이라는 것이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무의식이라는 것이 의식보다 더 무거운 까닭이다. 게다가 얼마 전 남편이 흘리고 간 지갑에서 남편의 옛 가족사진을 발견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김지수가 이성민에게 후처 운운하며 감정을 폭발하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닌 상황이었다. 아마도 이성민이 정상이었다면 김지수에게 평생 지우지 못할 깊은 상처가 될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성민 본인도 답답하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술에 정신을 다 빼앗겨도 술꾼에게는 하늘이 내린 귀소본능이 있어 과거가 아닌 현재의 집으로 돌아가게 해줬으니 말이다.

tvN 10주년 특별기획 금토드라마 <기억>

그렇다. 그것은 이성민이 납득하지 못한 것이 맞았다. 이성민이 취중에 박진희의 집을 찾은 것은 바로 알츠하이머의 장난이었다. 사무실에서 쪽잠을 잔 이성민은 새벽부터 친구인 정신과의사 최덕문을 찾아 지난밤 해프닝에 대해서 물었다. 옛 기억이 선명해지는 것은 알츠하이머의 보편적 증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이미 단단히 오해하고, 상처를 받은 아내를 이해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직은 40대. 아직 아이들도 어리고 아내도 젊다. 그런데 내가 알츠하이머에 걸렸다고 어떤 가장이 쉽게 입을 열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 계기가 전처의 집에 가서 잠든 자기 행동을 해명하기 위한 것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두 번 결혼한 이성민에게는 망각보다도, 멀어진 기억이 선명해지는 기억의 오작동이 더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기억의 원근법을 무시하는 이 기억의 오작동이 역으로 이성민의 결정적 무기가 될 것이다. 15년 전 어린 아들을 치고 뺑소니를 친 범인을 쫓는데 이 기억의 오작동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마치 15년 전의 누군가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주는 것과 같은.

tvN 10주년 특별기획 금토드라마 <기억>

그러나 그것은 나중 일이고 일단 이성민은 곤혹스러울 뿐이다. 초기라는데 불쑥불쑥 찾아드는 알츠하이머 증상도 두렵다. 술을 멀리해야 하는데 직업상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 그야말로 딜레마의 형국이다. 그런 이성민의 딜레마를 해결할 드라마틱한 해법은 바로 아내 김지수가 이성민의 옷에서 알츠하이머 패치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물론 당장은 부부가 합심해서 병과 싸우자는 훈훈한 모습은 아닐 것이다.

김지수 입장에서는 이처럼 심각한 병을 숨긴 남편이 또 미울 것이고, 자신을 믿지 못한 것은 더 괴로울 것이다. 그렇지만 이 남자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이 선택한 남자였다. 그래서 결국 병에 걸린 당사자보다 더 슬픈 역할을 해야 할지 모르는 입장이 될지도 모른다. 남편이 현재를 잃으면서 과거로 돌아가는 그 모습을 알고 지켜봐야 하니 말이다. 눈물의 여왕 김지수를 다시 만나게 될 것만 같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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