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40세를 ‘불혹’이라 부른다. 아니 불(不)에 미혹할 혹(惑), 미혹되지 않다. 무언가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않고 또렷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나이가 40세라고 <논어>는 말했다. 나이를 먹는 만큼 경험도, 식견도 늘어나는 만큼 분명 타당할 표현이지만 과연 지금 현실에서도 그러한가. 불혹만큼 자주 사용되는 표현은 아니지만, <논어>에서 30세는 ‘이립’(而立)이라 일컬었다. 자립을 하게 되는 나이라는 뜻이다. 허나 대부분은 30대에 자립은커녕, 중년이 되어서도 안정적이지 못한 처지에 놓인 이들이 대다수인 상황이다. 불혹이라 불리는 이들의 삶은 절대 불혹하지 못하다.

그러다 보니 모두들 힘들며 어렵다고 날것의 감정을 토해내고 쏟아내지만, 감정을 표출하고 싶다는 욕망 이상으로 나아가는 주장이나 작품은 보기 드물다. 만화가 김성희는 그 이상의 작품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눈여겨봐야 할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흔히 ‘르포 만화’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내가 살던 용산>, <섬과 섬을 잇다>를 비롯한 여러 작가가 참여한 르포 만화집, 그리고 삼성 반도체 노동자의 산재 문제를 그린 작품인 <먼지 없는 방>을 통해 김성희 작가는 사회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만화를 주로 그려왔다.

하지만 그녀를 단지 르포 만화가로써만 이해하고 넘어가기엔 아쉽다. 르포적인 작품을 그려온 만큼, 자전적인 경험이 녹아든 여성의 일상과 섬세한 내면적 접근이 담긴 작품들 역시 꾸준히 그려오면서 하나의 흐름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2010년에 출간된 첫 번째 작품집 <몹쓸년>에서는 30세가 된 여성을 주인공으로 가족과의 갈등, 결혼과 출산을 맞이하는 친구들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정 등 일상의 단면을 깊게 그려냈다.

이후 2013년에 발간된 <똑같이 다르다>는 장애인-비장애인 통합교육이 이뤄지는 학교의 특수교육을 다룬 일종의 르포만화였지만, 주인공을 임시 계약직으로 학교에서 일을 하게 된 보조교사로 그려내면서 <몹쓸년>의 연장선에 두는 동시에 그저 단순히 취업을 위하여 특수학급의 교사가 된 주인공이 조금씩 교육의 현장을 바라보고 느끼며 변하는 모습을 담아냈다. 어디까지나 중점은 ‘통합교육’에 있기에 주인공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부분은 많지 않았지만, 이러한 지점들은 김성희의 르포 작업과 심리를 그리는 작업이 하나로 묶일 수 있을 가능성을 비췄다.

마흔이 되었지만, 여전히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그리고 2015년 말에 출간된 신간 <오후 네시의 생활력>은 서로 분리되어 왔던 작업들이 하나로 응집되며 그간의 작품들과 맥락을 같이하면서도 독특한 작품을 만들게 되었다. 작품의 주인공은 마흔 살을 맞이한 여성 ‘이영진’이다. <몹쓸년>과 <똑같이 다르다>의 주인공이 그랬듯 세 주인공 모두 불안정하며, <똑같이 다르다>의 주인공처럼 <오후 네시의 생활력>의 주인공 역시 기간제 교사이다. 단지 <똑같이 다르다>에서 잠시 몸을 담고 있던 곳이 장애아동 통합학교였다면, 이 작품의 주인공은 기독교 사립재단에 속한 고등학교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나마 <똑같이 다르다>의 주인공이 학교에서 일을 하며 장애 아동과 비장애 아동이 서로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모습을 보며 변화의 실마리를 찾았던 것과 달리, 영진은 쉽사리 희망도 변화도 모색하기 어렵다. 이미 너무나도 지쳐있고 주변의 현실은 <똑같이 다르다>에서 드러난 교육의 현장과 달리 곧 변할 것 같다가도 반동하는 모습을 자꾸 보이기 때문이다.

40세는 또렷하게 세상을 볼 수 있는 ‘불혹’의 나이라 하지만, 현실의 40세 대부분은 그러지 못하다. <오후 네시의 생활력>의 주인공 영진 역시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다.

영진을 가장 지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불안정한 상황들이다. 오랜 시간 동안 임용고시를 준비하다 결국 사립학교의 기간제 교사가 되었지만, 안정적이지 못한 직장은 영진의 몸과 마음도 지치게 만든다. 영진은 작품의 초반부터 자궁에 근종이 생겨 제거 수술을 받은 이후에 의사로부터 임신을 하거나 아니면 자궁을 적출하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의사의 차가운 권고는 단지 영진의 몸에서 그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가 일하는 사립학교는 마치 살얼음판과도 같아 조금만 삐끗하면 천길 밑바닥으로 추락할 것 같기 때문이다. 의사는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고 했지만, 속마음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직장은 영진의 몸과 마음을 쉽게 지치게 만든다. 나이는 불혹이 되었지만, 불혹이란 말과 달리 도저히 정신을 차리기가 쉽지 않다.

불안정한 것은 여인이 일하는 사립학교 뿐만은 아니다. 영진은 혼자, 때로는 친구나 애인과 함께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보내는 일상 주변주변이 무척이나 위태롭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사회와 유리되어 공부만 바라보는 학생들, 이렇다 할 권리도 지니지 못한 채 쉽게 이용당하고 배척당하는 이주 노동자들, 그들과 다를 것 없이 이리저리 주위를 부유하는 노량진의 고시생들, 그리고 정치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정치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이 한국의 사람들. 주인공 영진이 느끼는 한국 사회의 모습은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경계에 서있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해도 바뀌는 것은 그리 없다. 당장 영진 자신부터가 학교에서 불합리한 일들을 계속 경험하지만 그저 퇴근 후 학교 밖을 나와 마음속으로 욕을 내뱉을 뿐, 약속한 계약 기간이 다 끝날 때까지 학교에서 이렇다 할 말도 꺼내지 못하는 소시민이기 때문이다. 영진은 내심 그런 모순을 납득하자며 자신을 다그치고, 그렇게 살아가는 힘이 ‘생활력’이라면서 계속 다짐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삶의 자세는 자기 자신을 갉아먹는 고통으로 다가온다. ‘생활력’을 통해 계속 사회에서 붙으며 살아나갈 수 있지만, 정작 그렇게 살아갈수록 오히려 삶의 운동력은 점차 줄어들고 만다. 작품은 그런 일상 속의 갈등과 역설을 수면 위로 드러낸다.

납득을 넘어, 미래를 모색하는 ‘생활력’을 꿈꾸며

작품 속의 갈등은 단지 영진의 것만은 아니다. 영진의 애인은 이주 노동자의 인권을 위한 단체에서 활동하며 그들의 인권을 당연하다는 듯이 무시하는 고용주와 싸운다. 오랜 시간 동안 부부로 지내왔던 영진의 부모는 서로 충돌하다 급기야는 이혼을 이야기하기에 이른다. 작가는 이러한 갈등들을 단순히 문제적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그치는 대신 왜 그렇게 행동하는 가에 초점을 맞추며 이 문제들을 일련의 경향으로 파악하려 한다. 마치 영진이 자신이 불의를 참는 걸 생활력이라는 말로 넘기려 하듯, 그들이 갈등을 빚는 이유도 결국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결과의 산물 중 하나로써 설명한다.

청년들이 사라진 시골에서 남겨진 노인들은 자신들이 농사를 지으며 겪는 노동의 고통을 이주 노동자를 마구 부리는 것으로 전가한다. 부부라는 이유로 서로 오랜 시간 동안 감정을 참고 참았던 노부부는 황혼에 접어들고 나서야 자신들의 감정을 비로소 쏟아낸다. 그저 사람이 원래부터 나빠서 갈등이 발생하고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놓여 있는 구조가 그들로 하여금 더욱 문제적 행동으로 이끌고 만다. 영진은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쉽게 남들에겐 말하지 못한다. 자신 또한 그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농촌의 노인들은 자신들이 농사로 얻은 고통을 이주노동자를 부리며 전가하고, 비슷한 일들이 한국 사회에선 빈번하게 벌어진다. <오후 네시의 생활력>은 단순히 이 갈등과 문제들이 개인의 책임이 아님을 드러낸다.

이렇게 문제를 인식해도 쉽게 변하지 않는 상황에서 영진은 후반부에 접어들며 사소한 저항을 시작한다. 비록 크게 말하고 행동하지는 못해도, 자신이 느끼고 고민한 바를 남들에게 조금씩 털어놓고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주어지는 불합리에 처음으로 거부를 선언한다. 영진의 부모 역시 서로 감정을 드러내고 다투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자신의 위치를 다시 인식하며 바꿔나간다. 물론 이 일들이 당장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세상은 영진이 원하는 방향으로 구르지 않고, 도리어 역행하려는 모습까지 드러난다.

하지만 이제 영진은 예전과 다르다.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쩔 수 없다며 납득하고 넘어가지 않는다. 그는 막판에 이르러 이전까지 드러내지 않았던 낙관적인 모습을 처음으로 드러낸다. 그 모습은 단순히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다. 영진은 여전히 많은 것을 불확실해 한다. 하지만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스스로 고개를 숙이는 대신, 다른 이들과 함께 하면서 앞으로 나가는 것을 멈추지 않기 위해 주인공은 낙관의 자세를 취한다. 그렇게 영진의 생활력은 현실을 순응하는 것에서 더 나은 현실을 모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삶의 모습을 바꾸는 것은 작중 영진이 그랬듯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불안정한 삶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길을 꿈꾸고, 삶을 바꾸고 싶다는 욕망을 마음 속 깊게 꾹꾹 숨긴 채 자신을 사회에 맞춰 순응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삶의 자세는 영진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자신이 알게 모르게 서서히 내면을 갉아먹고, 마치 작품 속에서 불합리를 그리 느끼지 못하는 사립학교 교사나 이주노동자를 마구 부리는 걸 당연히 여기는 노인들과 같이 문제적인 구조를 다시 재생산하는 요소들로 전락하게 만든다. 이렇게 <오후 네시의 생활력>은 비슷한 상황에 서있지만 서로 다른 길을 걷는 이들을 대비하며 이 사회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독자들에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김성희의 전작들에 담겨 있던 인간에 대한 깊은 탐구는 여전히 파릇하게 살아있고, 그 깊은 시선은 일상의 편린을 넘어 사회 전반을 비추면서 이리저리 뒤틀려있는 한국이라는 공간을 다각도로 바라보며 작품을 평범한 사적 만화에 머무르지 않게 만든다. 여기에 <먼지 없는 방> 이후로 스타일이 확립되어 이어지는 김성희 특유의 유려한 펜 드로잉은 만화적인 느낌을 살리면서도 사람의 특징을 잘 집어내어 독자의 부담감을 더는 동시에 내용의 현실감을 강화시킨다. 어떤 점에서는 2015년 실제로 불혹의 나이를 맞이한 작가가 많은 이들이 ‘불혹’이라는 말에 맞는 삶을 살 수 있는 ‘생활력’을 불어 넣는 작품이 바로 <오후 네시의 생활력>인 셈이다.

김성희 만화, 2015년 11월 25일 발행, 창비. 정가 13,000원.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