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후예>가 약속했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멜로였고, 다른 하나는 휴먼드라마였다. 그래서 합쳐서 휴먼멜로라는 것이었다. 먼저의 하나는 너무도 잘해왔다. 그래서 두 번째 것도 잘할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혹시라도 어설프면 어쩌나 싶은 우려가 조금 더 컸다. 그만큼 멜로는 기대 이상으로 잘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만큼 재난을 담기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대가 생겼다. 6회 마지막에 나온 짧은 씬 때문이다. 살다보니 나와 전혀 상관없는 직업의 선서에 눈물이 날 줄을 몰랐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간 의사를 다룬 드라마에서 몇 번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나왔어도 당연히 그저 그런가 보다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의사도 아니고, 의대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사람이라도 왠지 설레고 또 뭉클해진 경험을 갖게 됐다.

▲ KBS 2TV 수목드라마 <태양의 후예>

하필 강모연 일행이 우르크를 떠나는 날 6.7 진도의 대형지진이 발생했다. 그러면서 한국이 건설하는 발전소에도 대형 인명사고가 발생했다. 그보다 우선은 후발대로 오기로 한 동료를 걱정에 강모연은 다시 헬기를 타고 본진으로 돌아왔다. 다행스럽게도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안심하고 돌아설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강모연은 의료인력 전원을 응급구조체제로 바꾸기로 결정하고 사고현장에 서둘러 진입했다. 강모연은 사고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신고 있던 힐을 두들겨 굽을 떼어버렸다. 하면 제대로 하는 강모연의 성격의 일단을 보임과 동시에 우크르 지진의 심각성을 잘 드러내는 연출이었다.

▲ KBS 2TV 수목드라마 <태양의 후예>

발전소 사고현장은 지옥이 따로 없었다. 군인들이 먼저 와서 구조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재앙인 현장은 결코 적지 않은 의료인원에도 불구하고 구조와 응급처치가 원활할 수 없었다. 트리아지 실수로 환자를 잃는 일도 그려졌다. 의사가 경험이 부족해서 진단을 잘못한 것도 있겠지만 그만큼 재난상황에서의 환자는 상태가 급변한다.

그런 내용들은 미드의 의학드라마를 통해서 이미 익숙해진 것이 다소 부족했던 설명을 대신했다. 그렇게 정신없는 구조와 응급처치 현장을 그려가던 중 갑자기 배우들의 대사가 사라지고 화면이 달라졌다. 그리고 낮고 침착한 음색의 송혜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으매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사회적 지위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이상의 서약을 나의 자유의사로 나의 명예를 받들어 하노라”

▲ KBS 2TV 수목드라마 <태양의 후예>

원문의 내용의 조금 생략된 내용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진실해 보이는 서약이었다. 아니 글로는 주지 못할 전율이 더해진 것은 역시 드라마의 힘이다. 군인과 의사. 드라마 같지 않게, 오히려 다큐적인 톤으로 만든 짧은 씬이 생각지도 못한 감동을 줄 수 있었다. 이 선서에 낯선 시청자를 위해서 강모연은 일부러 천천히 서약 내용을 읽었다. 급박한 상황에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그 느린 말투는 오히려 덤덤함으로 위장한 결연함이었다.

아비규환의 현장이라면 목청껏 피 끓는 호소가 더 어울릴 것 같지만 그 역으로 간 것이 오히려 강모연의 변신에 힘을 실어줄 수 있었다. 교수가 목표였고 그러다 방송으로 얻은 유명세로 개인병원을 개업할 생각이나 하고 있던 그저 그런 속물의사였던 강모연이, 남이 준 의무는 다했지만 스스로 새로운 의무를 지겠다는 선서였다.

▲ KBS 2TV 수목드라마 <태양의 후예>

그렇기 때문에 유시진이 돌아왔고, 참 지랄 맞게 황홀한 하늘 아래서 그림보다 더 멋지게 안전화 끈을 묶어주었지만 아무 말 않고 군인은 구조하러, 의사는 치료하러 갈 길 가는 모습이었듯이 연애는 잠시 보류다. 둘의 외면은 오히려 키스보다 더 설레게 했다. 본인들도 또한 그랬겠지만 그 감정을 억누르는 둘의 모습은 또 다른 감동이었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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