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여론전의 도구이기 때문에 어디를 다녀도 접대를 받는다. 힘이 세고 영향력이 큰 언론일수록 그렇다. 언론도 같은 방식으로 돈을 쓴다. 한국에서 가장 힘 센 언론 넷이 함께 지갑을 열었다. 종합편성채널 4사는 한국언론학회(회장 조성겸 충남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언론정보학과 교수) 세미나를 후원했고 “지상파의 다채널서비스로 유료방송이 황폐화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을 만들어냈다.

종합편성채널 4사의 최대주주인 조선·중앙·동아일보와 매일경제는 4일자 신문에 한국언론학회가 3일 서울 프레스센터 19층 매화홀에서 연 세미나를 정리한 기사를 실었다. 세미나 주제는 ‘지상파 다채널방송(MMS: Multi-Mode Service) 도입의 쟁점과 전망’이었는데, 이 신문들은 모두 ‘지상파에 MMS를 확대하면 유료방송이 황폐화하고 지상파의 독과점이 심해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라는 취지로 보도했다.

△ 동아일보 2016년 3월4일자 2면
△ 조선일보 2016년 3월4일자 12면
△ 중앙일보 2016년 3월4일자 14면

우선 MMS가 무엇인지부터 보자. 기술발전으로 지상파가 쓰고 있는 주파수에 2개 이상의 채널을 송출할 수 있게 됐다. 기술적으로는 지상파 플랫폼에 십여개 이상의 채널을 더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지난해 EBS2가 생겼다. 주무부처인 방송통신위원회는 올해 EBS2 본방송을 추진하기 위한 방송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상태다. 새누리당 또한 총선 공약으로 예산 지원 확대를 약속했다.

그러나 종편과 보수신문은 ‘방송법 개정 과정에서 MMS 주체를 지상파방송사로 명시하면 EBS 외 지상파에도 MMS가 허용될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 MBN, 연합뉴스TV, YTN, JTBC, 채널A, TV조선이 지갑을 열어 세미나를 만들어낸 목적은 법 개정 과정에 개입하기 위해서다. 언론학회가 사전에 공지한 ‘기획의도’에서도 후원자들의 의도가 드러난다. “(EBS외 지상파에 MMS를 도입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해명에도) EBS 외의 지상파방송사에 다채널방송(MMS)을 허용할 법적 근거가 마련될 것을 우려하는 유료 방송사업자들의 목소리는 가라앉지 않고 있습니다.”

보수신문들이 보도한 대로 지금의 MMS가 시청자에게 큰 효과를 주지 못하는 것은 맞다. 사실 MMS는 실기한 정책이다. 십여 년 전 지상파 디지털 전환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진행했어야 할 정책이다. 그 동안 지상파 플랫폼은 사실상 붕괴했다. 지상파를 직접 수신하는 6.7% 밖에 안 된다. 어차피 90% 이상의 가구는 EBS2를 유료방송을 통해 시청해야 한다. 종편 출범 등 방송채널사용사업자의 경쟁이 심해진 탓에 지상파에 MMS를 운영할 재정적 능력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역설적으로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학계는 MMS를 확대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MMS에 상업광고를 허용할지 말지 이 문제는 방송사업자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기 때문에 판단을 유보하더라도, 언론학자가 무료보편 방송플랫폼과 방송채널이 늘어나는 것을 반대할 이유는 전혀 없다. 한발 더 나가 유료방송 트렌드에 밝은 학자라면 시민들이 지상파 MMS와 OTT(Over The Top·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그리고 지상파DMB를 동시에 활용하는 것이 유료방송 요금을 낮추면서 시청자의 권리를 강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지상파는 정부에 MMS를 허용하고 무료보편 플랫폼을 강화할 수 있는 제도적 지원을 해달라고 요구해야 한다(KBS에는 아직도 MMS추진TF가 있다). 지상파가 기술적으로 확보 가능한 MMS를 활용해 다양한 장르채널들을 만들고, HD급 화질의 DMB(또는 모바일 UHD방송)에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UHD 방송 도입 기본계획에 따라 IP망을 활용한 부가서비스를 할 수 있게 되면 지상파 플랫폼을 복원하면서 유료방송·통신요금 인하에 기여할 수 있다. 이동통신사와 일부 대기업이 독과점한 유료방송 시장에서 코드커팅까지 유도할 수 있다.

조건은 간단하다. “MMS만을 위한 상업광고를 하지 않고, VOD 요금을 대폭 인하하거나 EBS처럼 받지 않는다”고 선언하면 끝이다. 정부는 물론 종합편성채널도 이 명분을 깎아내릴 수는 없다. 20~30개의 지상파 채널을 무료로 보고, 원하는 프로그램을 OTT로 유료로 시청하고, 이동 중에는 OTT(유료)나 DMB(무료)를 이용하려는 시장은 분명히 있다. 정부는 방송복지 차원에서 무료보편 서비스를 더 강화해야 한다. 지상파에 더 많은 의무를 지워서라도 말이다. 방통위가 하반기 발표할 중장기 방송정책은 그래서 중요하다.

종편은 돈을 써서 정부와 국회를 압박했지만 성과가 전혀 없을 것이다. 돈 몇 푼에 양심을 버리고 스폰서 입맛에 맞는 말을 해준 언론학회 소속 학자들에게도 이번 세미나는 경력의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종편과 보수신문이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지상파는 오히려 정부와 중간광고를 협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종편과 보수신문들이 전략적이면서 동시에 명분을 챙기려면, 우선 지상파의 장삿속을 지적하면서 KBS 같은 공영방송에 “VOD 가격을 받지 마라”고 요구하는 게 맞다. 누가 반대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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