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의 중요한 흐름을 맡고 있는 사건은 맥락이 없다. 개연성이 떨어지는 일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입체적이라는 말로 해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캐릭터는 이랬다저랬다 널을 뛰며,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상황 설정과 표현이 가득하다. 눈에선 레이저가 나오고, 김치로 따귀를 때리는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다. 범죄와 폭력은 ‘드라마 전개’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자주 소환되지만, 소재로서의 역할이 끝나면 그에 대한 법적 처벌이나 이후 해결 노력 없이 자연스레 소멸된다. 소위 말하는 ‘막장드라마’의 엑기스만을 정리하면 이 정도가 아닐까.

어느새 고유명사로 자리잡은 ‘막장드라마’는 높은 비판의 목소리 속에서도 여전히 ‘건재’하다. 방송 내내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MBC드라마 <오로라 공주> 정도만이 연장 반대 운동, 협찬 불매 선언, 작가 퇴출 요구 등 시청자들의 강력한 ‘지탄’을 다양한 방식으로 체험한 작품이었다. 임성한 작가는 MBC드라마 <압구정 백야>로 또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고 결국 은퇴했지만, ‘막장드라마’의 역사는 계속 쓰이고 있다. 최근 종영한 MBC드라마 <내 딸 금사월>만 해도 패륜적인 장면의 반복, 작위적인 설정 등으로 ‘막장’이라는 혹평을 피할 수 없었으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종영했다.

3일 오후 3시, 서울 양천구 방송회관에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한국언론학회가 공동 주최한 <방송 드라마의 공적 책임, 이대로 좋은가? : 저품격 드라마의 공적 책임 회피 현상과 개선 방향 모색> 토론회가 열렸다. ⓒ미디어스

3일 오후 3시, 서울 양천구 방송회관에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한국언론학회가 공동 주최한 <방송 드라마의 공적 책임, 이대로 좋은가? : 저품격 드라마의 공적 책임 회피 현상과 개선 방향 모색> 토론회가 열렸다. 10명의 토론자가 막장드라마가 만들어지는 배경, 책임 소재, 막장드라마를 지양하고 보다 양질의 드라마를 독려하는 방안 등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견해를 나눴다. 그 중 가장 ‘뜨거운 토론’이 오갔던 부분은 막장드라마가 계속 만들어지는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 하는 부분이었다.

‘방송사 일탈’-‘욕하면서 보는 시청자 탓’-‘작가 가치관’ 의견 분분

유균 극동대 언론홍보학과 교수는 “일부 방송사의 저품격 드라마는 극히 일부 방송 관계자들과 작가들의 지극히 비뚤어진 일탈 행위다. 사회 규범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비도덕적 일탈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며 “여기에 적절한 조치가 내려져 당연히 규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YTN 김진호 문화사회정책부장 역시 “막장드라마를 편성해서 이익을 얻는 방송사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노동렬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막장드라마의 원인은 작가가 가진, 글쓰는 가치관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막장드라마를 썼던 사람들이 그런 드라마를 재생산하고 있다. 그런 분들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방송사의 몫”이라고 말했다.

<호랑이 선생님>, <은실이>, <푸른 안개> 등을 집필한 이금림 작가는 “(드라마) 제작사들은 (방송사) 편성을 따기 위해 스타를 뽑고 시청률이 나올 만한 작품을 잡아야 한다. 가장 시청률을 올리는 작가를 꼽으면 대개 막장드라마를 쓰는 작가들이다. 제작사가 ‘더 지독하게 써 오세요. 독하게 무섭게 써 오세요’라고 요구하면 거부할 수가 없다. 이런 과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 달라”고 밝혔다. 이어, “(막장드라마 때문에) 비난받는 대상 1순위가 작가인 것을 인정한다. 보다 건전한 가치관, 작품성을 먼저 생각하고 작품을 써야 하지만 그런 작가가 되는 길은 너무 지난하고 어렵다”고 전했다.

막장드라마가 이어지는 원인으로 ‘시청자’가 지목되기도 했다.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박상주 사무국장은 “시청자들이 보기 때문에 막장드라마가 만들어진다. 시청자가 보지 않으면 만들어질 수 없다. 방송사 입장에서는 (시청자들이 많이 보는 이런 드라마가) 수익이 된다”며 “제작사들은 방송사 편성을 받기 위해 굉장히 노력하는데 그 조건을 맞추기 위해서는 적어도 일일, 아침드라마에서는 막장코드를 뺄 수가 없다. 그러니 제작사는 (작가들에게) 그런 요구를 할 수밖에 없다. 결국 근본적인 원인은 (막장드라마를 즐겨보는) 시청층에게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에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강혜란 정책위원은 “시청자는 재미와 감동을 주는 드라마에 더욱 더 환호해 왔다고 생각한다. 가장 적은 비용으로 빠르게 시청자 호응을 얻을 수 있는 패턴들이 확인되면서 막장드라마의 효용이 높아진 것으로 보는 게 맞다”고 강조했다.

막장드라마를 ‘덜’ 탄생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막장드라마의 원인과 책임 소재에 대한 판단이 제각각이었던 만큼, 다양한 개선 방안이 제안됐다. 강혜란 정책위원은 우선 “우리 사회 안에서 ‘비윤리적’ 혹은 ‘패륜’이라는 용어가 함축하는 범위에 대한 견해차가 크기 때문에 이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한 후, △문제가 심각한 아침저녁 일일드라마 및 특정 작가 대상의 기획 모니터링 및 심의 필요 △비평 활성화 지원, 시청자단체 연계 모니터링, 시청자 참여형 온라인 심의 등을 통해 사회적 정당성 확보 △ 가이드라인 제정 등 방송사의 자발적 참여와 개선을 권고하는 접근 등을 제시했다.

노동렬 교수는 “6개월 이상 방송되는 일일드라마의 경우 명확한 주제의식 및 극중 갈등, 긴장감 등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한 명의 작가에게 장시간 고품격, 창의적 스토리를 기대하기도 어렵다”면서 “드라마 편성 길이를 축소하거나 공동집필 시스템 도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 작가가 아닌 책임 프로듀서 중심의 제작시스템이 정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방송 당시부터 현재까지도 계속 회자되고 있는 MBC드라마 <모두 다 김치>의 김치 따귀 장면

이금림 작가는 일본 방송사 NHK의 예를 들어 ‘방송사의 신뢰’를 중시했다. 이금림 작가는 “NHK는 타사에 비해 고료가 30% 정도 적은데도 (연기자들은) 거기 출연하고 싶어하고 작가들도 거기서 쓰고 작품을 싶어 한다. 방송사가 가진 신뢰, 이곳과 같이 일한다는 명예로움 덕이라고 한다”며 “대표적인 지상파이자 공영방송인 KBS가 자체제작 드라마만이라도 정말 좋은 작품을 만들어서, ‘KBS드라마를 보면 안심할 수 있다’는 신뢰를 준다면 다른 지상파도 뒤따를 수 있는 부분이 생겨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김진호 부장은 “방송사 스스로 자정하는 노력을 하게끔 유도하고 강제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복해서 심의규정을 위반했을 경우 벌점을 가혹하게 주고, 반면 품격 있고 국민들에게 도움 되는 드라마를 만들었을 때는 독려할 수 있게 가점을 주는 방식을 고려해 볼 수 있겠다”고 설명했다.

박상주 사무국장은 최근 가장 ‘핫한’ 드라마 tvN <시그널>과 KBS <태양의 후예>를 언급하며 질 높은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전제작이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드라마의 퀄리티가 높고 시청자들도 좋아하는 데에는 사전제작이 가능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사전제작이 이뤚??연출자, 작가, 제작자들이 충분히 논의해 개연성 있는 장면을 표현할 수 있다. 사전제작을 위해서는 제작비 문제가 있는데, 광고 재원이 충분히 마련돼 제작비에 투여된다면 퀄리티가 보장되리라고 본다”며 “방통심의위에서 광고규제를 완화해주시면 좀 더 좋은 드라마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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