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방송에서조차 ‘공적 섹터’는 사라졌다. KBS와 EBS 두 공영방송사는 방송외 사업으로 ‘수지’를 맞춰 흑자를 내야하고, 영업이익의 일부를 정부에 배당해야 한다. 두 방송사는 이달 초 각각 9억8천만원, 4억800만원을 국고에 납입했다. 2014년 영업이익의 28.5%, 25.5%다. 기획재정부는 방송통신위원회에 배당을 고려해 예산을 배정하고 방송통신발전기금 등 보조금을 분배하겠다며 달랬으나, 기재부가 방송사는 물론 국회와 방통위의 반대 의견에도 공영방송사에 ‘정부 배당’ 결정을 강행한 것은 정부가 공영방송을 비즈니스 조직으로 인식하는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 최성준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사진=미디어스)

정부 입장은 분명하다. 박근혜 정부는 2014년 12월 모든 정부출자기관에 대해 예외 없이 배당을 받고, 2020년까지 배당성향을 40%까지 확대하기로 한 방침을 발표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부터다. 주무부처인 방통위는 앉아서 당했다. 아니, 오히려 기재부 방침을 적극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최성준 방통위원장이 기재부에 설득된 것도 정부 방침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국유재산법 상 절차를 생략한 공영방송사와 그 이사회의 결정은 무효”라고 밝히고 방송사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해도 모자랄 판에 방통위는 기재부 입장을 완전히 수용했다. 기재부는 “방송사의 특수성을 이해하지만 예외를 둘 경우 다른 공공기관을 컨트롤할 수 없다”며 방통위를 설득한 것으로 전해졌는데, 결국 방통위가 기재부에 백기를 든 꼴이다.

최성준 위원장은 11일 방통위 전체회의에서 “올해는 방통위의 입장을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으나, 내년 이맘때에도 같은 장면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배당’과 ‘예산’을 맞바꾸기로 관행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KBS의 경우 30년만의 배당이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있다. 기재부가 예산과 정부지원금을 약속했기 때문에 공영방송사 입장에서는 손해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기재부가 추진하고 방통위가 방조한 이번 사건은 공영방송사 스스로 수익성을 강화하는 계기가 된다. 그렇지 않아도 KBS를 포함한 공기업의 인력 규모와 임금 체계를 ‘적폐’로 보며 ‘정상화’하려는 것이 박근혜 정부다. 방통위는 이번 결정으로 KBS와 EBS를 ‘정상화 대상’이자 ‘사업자’로 만들었다.

이번 정부 배당은 장기적으로 방송의 밑단을 흔들 수 있다. 공영방송의 경영진은 사실상 청와대와 방통위가 결정하는데, 방송사 경영진에게 앞으로 ‘배당의 규모’는 ‘성적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부 배당은 공영방송사가 인력과 제작비를 줄이고, 자산을 매각하고, 방송외 수익사업을 강화하도록 드라이브를 거는 명분이 된다. KBS는 공적 재원이 40% 수준이기 때문에 MBC나 SBS와 달리 이해관계 싸움에서 조금 점잖았으나, 이제 방송사업에서도 규제완화를 요구해야 하고 방송외 사업도 다각도로 추진하고, 인력감축도 더 강하게 추진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정부가 KBS의 자본금을 모두 납입하지 않고 배당받을 권리를 요구하고, 준조세인 수신료에 배당을 요구한 것 자체가 부적절하지만 이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제 공영방송이 ‘배당을 하기 위한 기업’이 됐다는 데 있다. 이번 일을 단순히 “방송사 직원이 국유재산법 개정 내용을 잘 몰라” 일어난 해프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이유다. 하지만 방통위는 공영방송사까지 사기업처럼 만들어버렸다. 방통위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공영방송이 갖고 있는 공적 섹터를 보호하고 이를 확대하는 것이다. 이번 방통위 결정은 이 같은 정책방향에 역행하는 것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방송사를 상대로 소송을 시작하라. 이것은 방통위가 해야 할 아주 작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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