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08년 중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때 첫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에,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에는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청소년들이 ‘이성’에게 갖는다는 성적 호기심, 사람들이 ‘이성’과 경험한다는 성적 긴장을 여자친구들에게 느끼고 있었다.
제도교육에서 내가 ‘성애’나 ‘사랑’에 대해 공식적으로 배운 것은 모두 이성애에 대한 것이었다. 딱 한 번 동성애에 관한 언급이 교과서에 등장했었다. HIV에이즈에 대한 설명으로 ‘동성애자에게서 처음 발견되었다’는 언급이었다. 그 외에는 없었다. 성교육 시간에도, 가정 교과서에서도, 사람이 동성에게 성애적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이야기된 적은 없었다. 나와 같은 사람의 존재나 감정은 어쨌든 제도교육이라는 공적 공간에서는 삭제되는 무엇이었다. (내가 제도교육에서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최근 고등학교 ‘생활과 윤리’ 교과서에는 성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일부 학교, 일부 학생만이 선택하는 과목이기에 한계가 있지만, 긍정적인 변화이다.)
그때로부터 7년이 지난 올해, 교육부는 ‘학교 성교육 표준안’을 내며 성교육의 질 향상을 목표한다고 발화했다. 하지만 표준안의 내용은 7년 전 성교육의 수준과 비슷하거나 더 보수적이고 더 구렸다. 대표적으로 이성애가 아닌 성적 지향, 시스젠더가 아닌 성별정체성에 대한 내용이 초․중․고 과정 전체를 통틀어서 거의 부재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3월에 발표한 성교육 표준안의 연수 자료에는 성소수자나 다양한 성적 지향에 대한 지도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내용마저 있었다. 이 내용은 교육부가 최종적으로 발표한 표준안에서는 삭제되었다.
내 삶에 도움이 되었던 연애, 성, 섹스에 대한 지식이나 태도 중 제도교육에서 배웠던 것은 하나도 없다. 특히 성교육에서 배웠던 것은 더더욱 없다. 제도교육 바깥의, 넘쳐나는 연애 기술서적이나 실용 지식들도 이성애 중심적이고 성차별적이어서 도움이 되었던 것이 없었다. 내게 도움이 됐던 자료는 이성애 각본의 허구를 무너뜨리고 여성의 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발화하는 페미니즘 서적과 글들이었다. 그 외에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사랑에 대해 다룬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만이 도움이 되었다(그러나 그 책에도 성소수자 차별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좋은 교육을 받을 권리는 모든 학생에게 보장되어야 한다. 좋은 교육은 일차적으로 당사자 학생의 삶에 도움이 되는 교육이어야 하고, 또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할 수 있는 교육이어야 한다. 여기서 좋은 사회란 ‘어른들 보시기에’, 권력을 가진 세력의 관점에서 좋은 사회가 아니라 교육의 당사자인 학생들과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좋은 사회를 의미한다. 성소수자인 학생이 여느 학교, 학급에나 일정 비율 존재함에도 성소수자를 위한, 성소수자에 대한 교육이 실시되지 않는 것은 명백히 부조리한 상황이다.
교육학자 아이스너는 특정 이념이나 문화 세력에 의해 제도교육에서 의도적으로 특정 지식, 가치, 행동양식을 배제하여 지워 버린, 그래서 학생들이 배우지 못하고 놓치게 되는 부분을 ‘영(0) 교육과정’이라고 개념화했다. 성소수자의 존재와 다양한 성적지향, 성별정체성은 이렇게 의도적으로 배제된, 그러나 평등과 인권의 관점에서 꼭 시행되어야 할 교육과정이다.
※ 이 글은 인권운동사랑방 웹진 <인권오름>에 실렸습니다.